롯데뮤지엄 이강소 개인전 '일어나고 사라지는' 21일 개막
천에 덮은 '유령조각' 20여점·'던지기 조각' 30여점…보이지 않는 작품도 전시
화선지·먹 신작 첫 공개…1973년 '소멸'도 오늘의 공간으로 재구성
작품을 보러 갔는데 보여주지 않는다. 서울 잠실 롯데뮤지엄 전시장 한쪽, 철제 선반에 놓인 조각 스무여 점은 흰색과 누런색 천을 뒤집어쓰고 있다. 이강소(83)가 작업실에서 실제 작품을 보관하던 모습을 옮겨온 이른바 '유령조각'이다. 천 사이로 모서리와 덩어리 일부만 삐져나왔다.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으니 오히려 자꾸 눈이 간다. 150여점을 내놓은 대규모 개인전에서 가장 궁금한 작품이 가장 덜 보인다.
롯데뮤지엄 '이강소: 일어나고 사라지는' 전시장에 천으로 덮인 이른바 '유령조각'과 작가의 작업 도구·사진·영상 자료가 함께 놓여 있다. 이강소가 실제 작업실에서 조각을 보관하던 방식을 전시장으로 옮겼다. 사진 박찬우·롯데뮤지엄
21일 개막하는 '이강소: 일어나고 사라지는'은 회화와 조각, 설치, 판화, 사진, 영상으로 그의 반세기 작업을 펼친다. 최근 몇 년 사이 국립현대미술관과 대구미술관에서도 이강소의 대규모 전시가 이어졌으니, 또 한 번 '한국 실험미술의 거장 60년'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번 전시에서 오히려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가 오랫동안 작품을 덜 결정해온 방식이다. 흙은 던지고, 그림은 비워두고, 때로는 닭에게 흔적을 맡기고, 완성된 조각마저 천으로 가린다.
전시는 그 질문을 꽤 영리하게 꺼낸다. 입구에서는 대표 회화 '청명'을 원작과 같은 크기의 LED 화면으로 바꾼 신작이 관객을 맞는다. 맞은편 거울에는 화면이 다시 반사된다. 눈앞의 것이 작품인지, 빛으로 옮겨진 이미지인지, 거울 속 반영인지 금세 뒤섞인다. 이강소가 오래 다뤄온 실재와 이미지, 보는 것과 있다고 믿는 것 사이의 간격을 전시의 첫 장면에서 슬쩍 벌려놓는다.
곧이어 놓인 '던지기 조각' 30여 점은 훨씬 육체적이다. 날것의 흙을 손으로 매끈하게 빚는 대신 공중에 던진다. 바닥에 떨어진 흙은 찌그러지고 다른 덩어리와 부딪쳐 예상하지 못한 형태를 얻는다. 이강소가 결정하는 것은 던지는 순간까지다. 그다음에는 속도와 중력, 충돌이 끼어든다. 같은 행동을 반복해도 똑같은 조각은 하나도 없다.
회화 앞에서는 반대로 눈이 느려진다. 넓은 화면 위로 먹빛과 회색의 붓질 몇 번이 지나가고 상당한 부분은 비어 있다. 멀리서는 오리나 배, 사슴 같은 것이 떠오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형상은 흐려지고 물감의 번짐과 붓이 지나간 속도만 남는다. 오리를 찾았다고 그림을 다 본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고 실패한 것도 아니다. 이강소는 무엇을 봐야 하는지 끝까지 정해주지 않는다.
이강소의 대표 회화 연작이 펼쳐진 롯데뮤지엄 전시장. 오리와 배, 사슴을 연상시키는 형상과 여백, 빠른 붓질을 통해 작가가 1980년대 이후 이어온 회화적 실험을 보여준다. 사진 박찬우·롯데뮤지엄
원본보기 아이콘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하는 화선지와 먹 작업도 그래서 재료 자체보다 작가의 나이를 생각하며 보게 된다. 수십 년간 캔버스와 아크릴을 다뤄온 사람이 여든셋에 다시 다른 바탕과 물성을 택했다. 오래 그린 화가에게 능숙함은 장점이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한 습관일 수도 있다. 이강소가 말해온 '실험'은 계속 새로운 모양을 발명하는 것보다 자기 손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을 경계하는 데 가까워 보인다.
그 태도는 1970년대부터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75년 파리비엔날레에서는 석고 가루 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닌 닭의 발자국을 작품으로 남겼다. 낙동강변의 갈대를 전시장으로 가져온 '여백'은 이번에 양쪽 거울을 만나 실제 공간보다 훨씬 멀리 이어지는 갈대밭처럼 변했다. 작가가 만든 물건보다는 그 장소에서 잠시 일어났다 사라지는 사건을 붙잡았던 시절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1973년 첫 개인전 '소멸'이다. 당시 서른 살의 이강소는 명동화랑에 그림 대신 선술집의 낡은 탁자와 의자, 술잔을 들여놓고 사람들에게 막걸리를 건넸다. 사람들이 마시고 이야기하다 떠나면서 생긴 관계와 시간이 작품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당시 선술집을 박제하듯 복원하지 않고 평상을 놓아 관객이 앉고 대화하게 했다.
흙을 공중에 던져 중력과 충돌이 만들어낸 형태를 그대로 받아들인 이강소의 '던지기 조각'이 전시장에 놓여 있다. 작가의 통제보다 우연과 과정에 무게를 둔 그의 조각 세계를 보여준다. 사진 박찬우·롯데뮤지엄
원본보기 아이콘다만 53년 전의 충격까지 그대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오늘의 미술관에서 관객 참여나 휴식 공간은 이미 익숙하다. 과거 작품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당시 '그림 없는 전시'가 던졌던 낯섦과는 거리가 있다. 이강소의 옛 실험을 지금 다시 보여주는 일이 어려운 이유다. 형식을 재현하는 것과 그때의 질문을 현재형으로 되살리는 것은 다르다.
그 점에서 전시 후반부가 오히려 재미있다. 실제 작업실에서 가져온 대형 붓과 카메라, 사진과 기록물 사이에 다시 '유령조각'이 등장한다. 완성된 작품만 보여주던 회고전의 시간이 갑자기 작업 중인 작가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도구에는 반복해서 잡은 손의 흔적이 남아 있고, 천 아래 조각들은 아직 공개될 차례를 기다리는 것처럼 놓여 있다. 완성작 150점을 정리해 보여주는 전시인데 끝에 가까워질수록 '완성'이라는 말이 조금씩 수상해진다.
이강소는 이날 자신의 작업을 관통한 질문에 대해 "예상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만나는가"라고 했다.
전시장 끝에서 천을 뒤집어쓴 조각들을 다시 보게 된다.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작가는 그 정도에서 멈췄다. 흙을 던진 뒤 중력에게 자리를 내주었듯, 몇 번의 붓질 뒤 화면을 비워두었듯, 이번에는 보는 사람에게 나머지를 남겼다. 여든셋의 실험이 계속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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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11월1일까지. 롯데뮤지엄. 성인 관람료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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