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 거장 박서보미술관 개관, 연희동 자택·작업실 옆 2000㎡ 규모
21일 일반 공개, 개관전은 흐엉 도딘과 2인전…박서보 25점·도딘 17점
박서보의 마지막 백색 묘법부터 1990년대 작품까지
'기념관 아닌 동시대 플랫폼' 표방…다음 전시가 진짜 시험대

박서보미술관 3층에는 박서보(1931~2023)가 사인을 남기지 못한 그림 세 점이 있다. '묘법 No.230127' '묘법 No.230128' '묘법 No.230129'. 모두 그가 세상을 떠난 2023년에 그렸다. 세로 3.3m, 가로 1.92m의 흰 화면 세 장이 높이 8m의 전시장에 나란히 섰다. 박서보는 생전에 미술관이 생기면 이 작품들을 함께 걸고 싶어 했다고 한다. 미술관은 완성됐지만 그는 보지 못했고, 작품에는 끝내 서명이 들어가지 않았다.

박서보의 ‘묘법 No.230127’, ‘묘법 No.230128’, ‘묘법 No.230129’(2023) 박서보재단

박서보의 ‘묘법 No.230127’, ‘묘법 No.230128’, ‘묘법 No.230129’(2023) 박서보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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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1일 서울 연희동에 문을 여는 박서보미술관의 첫 전시는 박서보 개인전이 아니다. 베트남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해온 흐엉 도딘(1945~)과의 2인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이다. 박서보 25점, 도딘 17점. 한 작가의 이름을 건 미술관이 개관하면서 그 작가의 작품으로 전관을 채우지 않았다. 박서보재단이 이곳을 유작을 모아놓는 기념관보다 한국 현대미술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전시·연구·교육 플랫폼으로 만들겠다고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서 드러난다.


두 작가를 잇는 인연은 오래되지 않았다. 2023년 여름, 한국에서 첫 개인전을 열던 도딘이 폐암 투병 중이던 박서보를 찾아왔다. 박서보가 세상을 떠나기 석 달 전이었다. 사용하는 언어도 달랐다. 당시 박서보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도딘과 나는 말이 통하지 않지만 통역이 필요 없었다"며 두 사람이 평생 비슷한 작업을 해왔기 때문인지 모르겠다고 적었다. 도딘은 박서보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해외 작가가 됐다.

두 사람을 묶는 전시의 언어는 '비움'이다. 박서보는 물에 불린 한지를 화면에 붙인 뒤 연필이나 도구로 긋고 밀어내기를 반복했다. 도딘은 광물 안료를 아주 얇게 바르는 일을 수십 차례 되풀이한다. 한쪽에서는 골이 생기고, 다른 쪽에서는 색의 층이 생긴다. 무엇인가를 계속 더하는 노동인데 완성된 화면에서는 오히려 흔적이 줄어든다. 미술관은 이를 반복·축적·절제라는 공통점으로 설명한다.


흐엉 도딘의 ‘무제’(1990) 박서보재단

흐엉 도딘의 ‘무제’(1990) 박서보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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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움'이라는 말만 따라가면 두 화가는 너무 쉽게 닮아버린다. 실제 전시장에서는 차이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지하 2층 'SPACE Ø'에는 두 사람의 1990년대 작업이 섞여 있다. 박서보의 한지묘법 옆에 걸린 도딘의 1990년작 '무제'에는 회청색 화면을 가르는 가느다란 선과 돌처럼 둥근 형상이 남아 있다. 박서보의 화면이 일정한 방향으로 반복되는 손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품는다면, 도딘의 화면에서는 그 움직임이 안료 아래로 가라앉는다.

박서보의 시간이 표면에 패어 있다면 도딘의 시간은 여러 겹의 색 안에 숨어 있다. 전시가 재미있어지는 것도 두 사람을 '동양적 명상'이나 '절제의 미학'으로 한꺼번에 묶을 때보다 이렇게 다른 재료와 손의 속도를 비교할 때다. 전시장의 어두운 조명도 두 화면의 물성을 가까이 들여다보게 한다.


2층 'SPACE 2'에는 도딘이 없다. 박서보의 그림만으로 검은 한지묘법에서 색채 한지묘법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방에서는 '단색화 거장 박서보'라는 익숙한 수식어가 조금 불편해진다. 검정과 회색이 지나간 자리에 빨강과 노랑이 등장한다. 2000년대 이후 박서보가 자연에서 가져온 색을 화면 안으로 밀어 넣으면서 묘법은 생각보다 요란해졌다. 검은 작품에는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에 대한 기억이, 후기 색채 작업에는 현대인이 자연에서 위안을 얻기를 바랐던 생각이 담겼다는 게 미술관의 설명이다.


흐엉 도딘  'X.K.N.31' 박서보재단

흐엉 도딘 'X.K.N.31' 박서보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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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3층이다. 건축가 최문규가 만든 '큐브'에는 천장까지 8m의 높이가 확보돼 있다. 네 벽을 감싼 반투명 유리 사이로 자연광이 들어온다. 그 한가운데 박서보의 마지막 백색 묘법 세 점이 놓였다. 정면에서 보면 흰색에 가까웠던 화면은 몇 걸음 옆으로 움직이면 한지의 골이 도드라지고 푸른 기운이 보인다. 고정된 조명이 아니라 바깥 날씨와 관람객의 위치가 작품 표면을 계속 바꾼다.


맞은편에는 도딘의 'X.K.N.31'(2025~2026)이 걸렸다. 박서보를 만난 뒤 그 기억을 담아 만든 그림이다. 2023년에 작업을 멈춘 박서보의 세 작품과 그 만남 이후에도 계속 작업한 도딘의 그림이 같은 공간을 쓴다. 개관전이 두 사람의 짧은 인연을 다소 낭만적으로 포장하고 있다는 의심은 지하 전시장에서는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방에서는 적어도 그 만남 이후 두 화가에게 각각 흘러간 시간이 눈앞에 놓인다.


미술관 자체도 박서보의 시간을 품은 장소에 지어졌다. 생전 생활하고 작업했던 연희동 자택과 작업실 바로 옆이다. 지하 2층~지상 3층, 연면적 2000㎡ 규모로 전시장 세 곳과 커뮤니티 공간, 층마다 작은 정원을 뒀다. 밖에서 보면 청록색 외벽 위에 흰 큐브를 얹은 듯하다. 전시장을 오르내리는 동안 창과 정원이 여러 차례 끼어들어 작품만 바라보던 시선을 밖으로 빼낸다.


박서보(왼쪽)와 흐엉 도딘. 박서보재단

박서보(왼쪽)와 흐엉 도딘. 박서보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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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건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 만들어진 작가미술관에는 피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작품은 '대표작'으로 굳고, 작가는 몇 개의 수식어로 정리된다. 박서보라면 단색화, 묘법, 수행, 치유 같은 말들이다. 더구나 박서보의 작품은 이미 국제 미술시장에서도 강력한 브랜드가 됐다. 그런 이름을 미술관이 얼마나 열어둘 수 있을까.


개관전의 흐엉 도딘은 그 질문에 대한 첫 답이면서 동시에 비교적 안전한 답이기도 하다. 박서보와 생전에 교감했고 반복과 절제, 회화의 수행성을 공유한다. 작품을 함께 놓았을 때 충돌보다 공명이 훨씬 크다. 미술관이 말하는 '동시대 플랫폼'의 성격은 오히려 다음 전시부터 더 분명하게 드러날 가능성이 크다. 박서보와 전혀 닮지 않은 작가, 그의 미학과 충돌하는 작업, 단색화의 성취만이 아니라 그 시대를 다른 방향에서 읽는 시선까지 이 이름 아래 들어올 수 있을지의 문제다.

박서보미술관 외관. 박서보재단

박서보미술관 외관. 박서보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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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는 1967년부터 반세기 넘게 묘법을 그리는 동시에 '에꼴 드 서울'과 '앙데팡당' 등을 만들며 다른 작가가 설 자리를 만드는 데 관여했다. 재단은 미술관에서도 젊은 작가의 기획전과 연구 지원, 교육 프로그램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박서보가 남긴 작품을 얼마나 많이 보여주느냐보다 그의 이름을 건 공간에 앞으로 누가 들어오느냐가 중요해진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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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의 백색 묘법 세 점에는 여전히 사인이 없다. 미술관은 20일 개관식을 거쳐 21일부터 관람객을 받는다. 개관전은 내년 1월3일까지다. 매주 화~일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하며 관람료는 5000원이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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