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자원 통제'와 중국 공세
흔들리는 K-배터리·모빌리티 구상
며칠 전 다시 찾은 자카르타는 겉으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도로는 자동차와 오토바이로 가득했고 쇼핑몰도 화려하게 불을 밝혔다. 하지만 현지에서 만난 모두가 "경제가 좋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최근 연료 가격과 공급 문제로 홍역을 치른 탓인지 주유소 앞에는 기름을 넣으려는 차량이 길게 늘어선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었다.
금융시장의 분위기는 더욱 냉랭하다. 외국인 자금 이탈이 이어지면서 루피아가 약세를 보였고, 한때 인도네시아 주가는 연초 대비 40% 이상 추락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와 묘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의 자신감이다. 프라보워 정부는 최근 오히려 자원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을 더욱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우리가 정한 가격을 지불하기 싫다면 사지 않아도 된다." 프라보워 대통령이 지난 14일 의회에서 한 말이다. 대상은 니켈과 주석, 금 같은 인도네시아의 전략자원이다. 제대로 된 가격을 받을 수 없다면 자원을 서둘러 팔 필요가 없다며 "우리 자손을 위해 땅속에 남겨두는 편이 낫다"고까지 말했다. 단순한 정치적 수사로 넘기기 어렵다. 실제 프라보워 정부는 2027년 1월부터 전략 광물을 거래하는 새로운 상품거래소를 운영할 계획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되는 니켈과 주석 등의 가격을 해외 시장에만 맡기지 않고 자국에서 기준가격을 형성하겠다는 구상이다.
이유가 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 니켈 생산국이다. 근래 전기차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니켈의 전략적 가치도 커졌다. 니켈은 한국 배터리 기업들이 강점을 가진 NCM(니켈·코발트·망간)과 NCMA(니켈·코발트·망간·알루미늄) 계열 배터리의 핵심 소재다. 니켈 함량을 높이면 배터리의 에너지 밀도를 높일 수 있어 장거리 전기차에 유리하다.
그간 인도네시아는 니켈을 외국 기업을 끌어들이는 지렛대로 사용해왔다. 조코 위도도 전 대통령이 추진했던 '힐리리사시(hilirisasi·다운스트리밍)' 정책이 대표적이다. 니켈 원광을 캐서 그대로 수출하지 말고 국내에서 상품화해 부가가치를 높이자는 취지였다. 그러자 외국 기업들은 제련소와 소재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중국 기업들이 가장 적극적이었고 한국 기업도 뛰어들었다. 프라보워 정부는 이 정책을 계승하면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가격 결정력까지 확보하려는 모습이다.
한국 대기업들의 발등에는 불이 떨어졌다. 현대자동차는 앞서 2019년 인도네시아에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다. 일본 자동차 업체가 사실상 장악하고 있던 시장에 뛰어들어 자카르타 동쪽 브카시 지역에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최초의 현대차 완성차 공장을 세웠다. LG에너지솔루션도 뒤따랐다. 2020년 인도네시아 정부와 이른바 '그랜드 패키지'에 합의했다. LG에너지솔루션과 LG화학, LX인터내셔널 등이 인도네시아 국영 광산기업 안탐(Antam), 인도네시아배터리공사(IBC) 등과 함께 참여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2024년 7월에는 현대차그룹과 LG에너지솔루션이 합작한 HLI그린파워 배터리셀 공장도 서부 자바 카라왕에 문을 열었다. 연간 생산능력 10GWh, 전기차 약 15만대의 배터리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당시 조코위 전 대통령은 상당히 자신만만했다. 광산과 니켈이 있고 제련소와 전구체·양극재 공장, 배터리 공장과 자동차 공장까지 인도네시아에 모두 갖춰지게 됐다는 것이다. 현대차와 LG에도 이상적인 그림이었다. 세계 최대 니켈 산지에서 배터리를 만들고 바로 옆에서 자동차를 생산해 인도네시아와 아세안 시장에 판매한다. 원료 확보와 생산, 시장을 한 지역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구상은 2024년 10월 프라보워 대통령 취임 이후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2025년 4월 LG에너지솔루션은 10조원이 넘는 규모로 추진되던 그랜드 패키지에서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현대차와 합작한 카라왕의 배터리셀 공장은 계속 운영하지만, LG가 니켈 채굴에서 제련과 소재까지 직접 연결하려던 더 큰 수직계열화 구상을 포기한 것이다.
앞뒤를 따져보면 사정이 개운치 않다. 한국은 인도네시아에 배터리셀 공장과 자동차 공장을 선투자했지만, 애초 큰 그림의 출발점이었던 니켈 채굴과 제련·소재 부문에서는 쉽게 말해 밀려났다. 반대로 중국 기업들은 더욱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LG가 빠진 자리를 중국의 화유코발트가 대신했다. 중국계 기업들은 니켈 광산과 제련, 배터리 소재사업을 이미 광범위하게 벌이고 있다. 현대차의 사정도 편치 않다. 올해 들어 비야디(BYD)를 비롯한 중국 전기차 브랜드가 빠르게 판매를 늘리면서 현대차가 당초 기대했던 아세안 전기차 선점 구도도 크게 흔들리고 있다.
2019년 현대차가 인도네시아에 첫발을 내디딜 때와는 환경이 크게 달라진 셈이다. 중국 기업들은 광산과 제련에서 배터리와 완성차까지 빠른 속도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게다가 프라보워는 '자원통제'라는 게임의 규칙 자체를 바꾸려고 하는 눈치다.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연 10% 이자' 준대도 돈 싹 빼는 중…"예금을 국...
정호재 아시아비전포럼 사무국장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