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교 교관·군의장·의사연구회 초대 회장 지내
일본서 근대의학 배운 뒤 대한제국으로 귀국
국권 위기 속 의료 인재 키워
2000년대 들어 뒤늦게 재평가

최근 배우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를 둘러싼 친일 행적 논란이 이어지면서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 근대의학을 공부했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조선인 의사 김익남의 생애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김익남(사진 왼쪽)과 김교준. 대한민국 의학 발전에 힘썼던 사제 관계로 출발해 40년 동안 친형제 같은 사이였다. 연합뉴스

김익남(사진 왼쪽)과 김교준. 대한민국 의학 발전에 힘썼던 사제 관계로 출발해 40년 동안 친형제 같은 사이였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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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소셜미디어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안상호와 김익남의 삶을 비교한 게시물이 올라왔다. 두 사람 모두 대한제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한 관비 유학생 출신이지만 귀국과 이후 활동을 둘러싼 선택은 크게 엇갈렸다는 내용이다. 특히 최근 안상호의 친일 행적을 둘러싼 논란이 재점화되면서 대한제국의 부름에 귀국해 근대 의학 교육과 의료인 양성에 힘썼던 김익남의 행보도 함께 조명되고 있다.

같은 관비 유학생으로 졸업 뒤 완전히 달랐던 두 사람의 선택

최근 논란의 중심인 안상호와 마찬가지로 김익남 또한 대한제국의 지원으로 일본에서 근대의학을 공부했다. 그는 안상호와 같은 지케이의원의학교 출신으로, 안상호보다 3년 먼저 졸업한 선배였다. 그러나 졸업 이후 두 사람이 걸었던 길에는 뚜렷한 차이가 나타났다. 그 갈림길 가운데 하나가 대한제국이 설립한 최초의 관립 근대 의학 교육기관 '의학교'의 교관 임명을 둘러싼 대응이었다.

'매일신보' 1937년 4월 6일자 김익남 선생 별세 기사.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매일신보' 1937년 4월 6일자 김익남 선생 별세 기사.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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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남은 1899년 7월 지케이의원의학교를 졸업한 뒤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의학교 교관으로 취임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이듬해인 1900년 8월 귀국해 교관으로 부임했다. 김익남은 이후 약 4년간 의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며 총 32명의 한국인 근대 의사를 배출했다. 대한제국의 국권이 급속히 흔들리던 시기에 근대 의학교육을 받은 한국인 의사 집단을 양성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의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김익남은 이후 국가의 요청에 따라 대한제국 육군 군의장으로 자리를 옮겨 군진의학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1908년에는 일본인 의사들이 중심이 된 '계림의학회'에 대응해 한국인 의사들의 단체인 '의사연구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반면 김익남의 후임 의학교 교관으로 지명된 인물이 안상호였다.

안상호는 1904년 10월 의학교 교관으로 임명됐지만, 당시 일본에서 귀국하지 않았고, 약 석 달 뒤 교관직에서 해임됐다. 그가 국내로 돌아온 것은 1907년이었다. 당시에는 이미 의학교가 일제 통감부의 의료기관 개편 과정에서 대한의원으로 통합된 이후였다. 같은 학교에서 근대의학을 배우고 대한제국의 지원을 받은 두 사람이지만 국가의 귀국 요구와 이후 활동에서는 상반된 모습을 보인 셈이다.

김익남, 일제와 거리 두다 불이익 정황도

김익남이 일제와 거리를 두었던 것을 보여주는 정황도 남아 있다. 그는 1907년 6월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시도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정재홍 의사의 추모 사업에 참여했다. 이 같은 활동 때문에 일제로부터 불이익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당시 일제가 의료계를 관리하기 위해 발급했던 공식 의사 자격인 '의술개업인허장'도 끝내 받지 못했다.


황상익 서울대 의과대학 명예교수는 연합뉴스에 이를 김익남이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로 평가했다. 황 교수는 "의료계와 교육계, 군진의학 분야에서 요직을 거친 김익남은 일제가 적극적으로 포섭하려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인물"이라며 "그런데도 일제에 협력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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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김익남의 이름은 오랫동안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가 몸담았던 의학교가 대한제국의 국권 상실 과정에서 짧은 기간 만에 사라지면서 기관의 역사 자체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황 교수는 "대한제국이 자주적으로 설립한 의학교는 국권 상실과 함께 8년 만에 폐지된 이후 그 역사와 의미가 충분히 평가받지 못했다"며 "김익남 역시 국가가 사라지면서 자신이 활동했던 제도적 기반을 잃었다"고 설명했다.

뒤늦게 되살아난 이름…의학교 표석 세워지고 서울대 의대엔 동상

김익남의 생애가 본격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연구자들이 관련 자료를 꾸준히 발굴하면서 대한제국 의학교와 김익남이 한국 근대의학사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다시 평가받기 시작했다. 2015년에는 서울 종로구에 의학교 터를 알리는 표석이 설치됐으며, 2018년에는 서울대 의과대학 연건캠퍼스에 김익남의 동상이 세워졌다.

지난 2018년 서울대 의대에서 열린 김익남 선생 동상제막식 모습. 서울대의대

지난 2018년 서울대 의대에서 열린 김익남 선생 동상제막식 모습. 서울대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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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여 년 전 같은 대한제국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근대의학을 공부했던 안상호와 김익남. 최근 불거진 안상호의 친일 행적 논란은 역설적으로 비슷한 출발점에서 다른 선택을 했던 김익남의 생애를 다시 불러내고 있다. 황 교수는 "최근 논란이 한국 근대의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며 "이번 일을 통해 그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김익남 선생과 의학교의 역사적 가치가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방제일 기자 zeilis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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