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이상 극지연구 공로 인정받아…韓-노르웨이 '과학외교' 최일선
오빈 주한노르웨이대사 "한국은 혁신역량 보유한 중요한 북극 파트너"
미·중·러 '패권국 경쟁터' 된 북극…강성호 박사 "정치상황 어려워도 '과학' 매개로 협력해야"
"극지과학은 단순히 북극과 남극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사람을 연결하고, 국가 간 신뢰를 만들며, 다음 세대에 어떤 지구를 물려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학문입니다."
30년 넘게 극지를 연구해 온 강성호 박사(64·전 극지연구소장·사진 오른쪽)는 극지과학의 핵심 가치로 '신뢰'를 강조했다. 그는 최근 북극이사회 창립 회원국인 노르웨이 왕실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한국 과학자로서는 최초 사례다. 극지는 인류의 지성이 미처 닿지 못한 '최후의 미개척지'로 꼽히는데, 비(非)북극권 국가 출신의 연구자가 공로를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이다. 북극이사회 옵서버(참관국)로서 북극항로를 비롯한 각종 협력 기회를 얻기 위해 '과학 외교'에 공을 들여온 한국 정부로서도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안네 카리 한센 오빈 노르웨이 대사(왼쪽)와 한국 과학자 최초로 노르웨이 왕실 훈장을 받은 강성호 전 극지연구소장(박사)이 서울 성북구 주한노르웨이대사관저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에 앞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조용준 기자
"노르웨이 훈장, 개인 성취 넘어 30여년 이어온 韓-노르웨이 과학자들 간 신뢰·우정의 상징"
강 박사와 안네 카리 한센 오빈 노르웨이 대사는 지난 12일 서울 성북구 주한노르웨이대사관저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이번 훈장 수여를 계기로 수십 년간 이어온 한·노르웨이 과학 협력의 의미를 되짚었다. 강 박사는 "훈장은 개인의 성취를 넘어, 지난 30여년 한국과 노르웨이의 많은 과학자와 기관이 쌓은 신뢰와 우정, 과학협력에 대한 평가"라며 "앞으로도 양국의 극지 협력이 계속 발전할 것이란 상징"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국내에 '극지' 개념조차 생소했던 1993년 당시 해양연구소 극지연구센터(현 극지연구소 전신)에 들어와 국내 극지과학계의 발전을 이끈 인물이다. 2004년 기존 센터였던 연구조직을 별도로 분리해 극지연구소가 설립됐고, 강 박사는 2020~2023년 제7대 극지연구소장을 역임했다.
오빈 대사는 "노르웨이 정부를 대표해 훈장을 수여할 수 있어 큰 영광"이라며 "강 박사의 독보적 연구성과뿐만 아니라, 그가 극지연구소(KOPRI)를 이끌며 노르웨이와 공동 극지연구협력센터를 추진하는 등 양자 차원의 오랜 우정과 굳건한 유대도 함께 인정받은 것"이라고 축하를 건넸다.
한국을 기준으로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정반대편에 위치한 노르웨이. 양국은 지리적으론 꽤 멀지만, '북극 연구'를 매개로 밀접한 관계를 쌓아왔다. 오빈 대사는 "노르웨이와 한국 간에는 '북극 과학 협력'이 외교의 주요 축 중 하나"라며 "한국의 극지연구소 연구진이 20년 이상 스발바르 연구기지에서 활동한 덕분에 2013년 한국이 북극이사회 옵서버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지식과 과학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사람들과 공유되지 않으면 그 가치는 줄어들 것"이라며 "강 박사가 북극 지역의 다양한 이야기를 한국에 전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도 특히 강조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노르웨이 정부는 매년 최북단 도시 트롬쇠에서 북극 관련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행사 '북극 프론티어'를 개최하는데, 국내에서도 북극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정부나 연구진뿐만 아니라 기업 등 참여 범위가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북극海, 열강 패권경쟁에 '지구상 가장 뜨거운 바다'로…"정치 어려워도 과학협력은 이어져야"
정치적 분쟁에서 비교적 벗어나 '평화의 바다'로 불렸던 북극해는, 더이상 강대국의 패권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 중국 등 열강들이 북극항로의 경제적 가치에 본격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역설적으로 '지구상 가장 뜨거운 바다'가 된 것이다. 특히 북극이사회를 구성하는 8개국 중 핵심인 러시아가 2021년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서 북극을 둘러싼 정세가 휘몰아쳤다. 러시아는 북극 연안의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인데, '지속적인 데이터 축적'이 핵심인 극지 연구도 2021년부터 러시아와 다른 유럽국 간 협력이 뚝 끊겼다.
오빈 대사는 관련 질문에 "노르웨이로서는 북극에 거주하는 원주민들과 긴밀히 협력하기 위해 북극이사회 '8개 회원국'이 모두 주된 책임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며 "현 상황에서는 러시아와 정상적 협력을 추진하기 어렵겠지만, 분명히 북극이사회 회원국과 원주민은 (북극 관련) 공동의 과제에 대처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노르웨이는 현재 북극이사회 의장국이자, 그린란드를 이끄는 덴마크 왕국을 지지하고 있다"면서 "북극이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재의 국제정세를 감안하되, 궁극적으로는 러시아를 포함한 '완전체' 형태의 북극이사회가 앞으로도 핵심적인 다자 협의체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이어 그는 "북극이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다양한 관점을 가진 옵서버 국가들과도 협력할 것"이라며 "한국은 신기술, 친환경 해운, 탈탄소 등 여러 분야에서 혁신 역량을 가진 중요한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북극을 오래 연구해 온 과학자들도 고민이 깊다. 강 박사는 "극지연구는 어느 한 나라가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다룬다는 특징이 있다"며 "북극과 남극에서 일어나는 기후변화, 해빙 감소, 해양생태계 변화는 '국경을 넘어' 벌어지는 만큼 장기간의 관측 자료도 여러 나라가 함께 축적해야 의미가 있다"고 했다. 협력의 필요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절실해졌지만, 정치 상황 탓에 공동 연구가 어려워진 현실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과학자들은 정치적 상황이 어려울 때도 가능한 데이터와 연구의 연속성을 유지하며 서로 협력하려고 노력해 왔다"며 "과학이야말로 신뢰를 쌓고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외교 통로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극지과학과 과학외교의 중요한 가치"라고 강조했다.
차세대 연구자 관심 쏠리는 '극지과학'…"세계와 함께 연구하라"
극지 연구는 세대를 관통하는 이슈다. 북극항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차세대 연구자들의 이목도 쏠리고 있다. 강 박사는 극지과학 연구를 꿈꾸는 후배 과학자를 향한 조언을 묻자 "인공지능(AI)이나 위성, 첨단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좋은 과학은 정확한 관측과 좋은 데이터에서 출발한다"며 "가능하면 직접 북극과 남극 현장을 경험하라"고 권했다. 또 "극지과학은 처음부터 '국제과학'"이라며 "다른 문화와 생각을 가진 연구자를 존중하며 '세계와 함께 연구'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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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박사는 "오랜 시간 극지에서 배운 것은 결국 단순하다. 극지과학은 사람이고 협력이며, 책임이다"며 "다음 세대의 한국 연구자들이 좋은 과학자가 되는 동시에 세계를 연결하는 좋은 협력자가 되길 바란다"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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