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검열선 그대로…심훈 '그날이 오면' 90년 만에 조국 품으로
'상록수' 친필 원고 전체본도 첫 공개…유족 자료 46건 59점 기탁
셋째 아들이 美서 50년 넘게 보관…국립한국문학관 7년 협의 끝 귀환
원고 위로 붉은 선이 여러 번 그어져 있다. 곳곳에는 붉은 도장도 찍혔다. 1932년 심훈이 자신의 시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으려 했지만, 조선총독부의 검열은 그 길을 막았다. 그 원고 안에는 훗날 그의 이름과 함께 기억될 시 '그날이 오면'이 있었다.
시인이자 소설가, 독립운동가였던 심훈(본명 심대섭·1901~1936)이 남긴 친필 원고와 유품이 사후 90년 만에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국립한국문학관은 심훈 유족으로부터 기탁받은 문학·개인사 자료 46건 59점을 광복절을 앞두고 공개했다고 11일 밝혔다.
이번 자료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심훈이 1932년 출간을 위해 직접 엮은 '심훈시가집'이다. '그날이 오면'을 비롯해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당시 쓴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 등이 친필로 담겼다. 출판 허가를 받기 위해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관에 제출됐던 원고에는 붉은 선과 도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시집은 결국 생전에 출간되지 못했고 광복 이후인 1949년에야 유고 시집으로 세상에 나왔다.
장편소설 '상록수' 친필 원고 전체본도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그동안 국내에는 일부 회차의 낱장 9점 정도만 당진 심훈기념관에 보관돼 있었다. 새로 공개된 친필본에는 신문 연재본과 문장 구성이나 표현이 다른 부분이 있어 심훈의 창작 과정뿐 아니라 당시 조선어 문체와 일제 검열의 영향을 연구하는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직녀성'과 '영원의 미소' 친필 원고, 영화 각본도 함께 돌아왔다. 문학 작품뿐 아니라 심훈의 사진과 사망 소식을 전한 부고 전보 등 개인사를 보여주는 자료도 포함됐다. 심훈은 소설과 시뿐 아니라 영화·언론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활동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이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을 듣고 쓴 것으로 알려진 '오오, 조선의 남아여!'의 초고도 이번 자료에 들어 있다. 심훈은 당시 금메달 소식을 전한 신문 호외의 뒷면에 이 시를 적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생애 마지막 창작시로 알려진 작품이다.
이 자료를 지켜온 사람은 심훈의 셋째 아들 심재호(1936~2021)씨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해에 태어난 그는 심훈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 1974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버지니아주 알링턴 자택에서 부친의 원고와 자료를 정리해 보관했다. 자료 곳곳에는 그가 직접 남긴 메모도 붙어 있다.
심훈의 손녀 심영주씨는 기자간담회에 화상으로 참석해 이 자료를 아버지가 오동나무함에 약 50년간 보관해왔다고 설명했다. 유족들은 심훈의 자료가 결국 한국에서 보존돼야 한다는 뜻을 갖고 있었다. 지난 6월 자료를 한국문학관 측에 넘길 때도 "가야 할 곳으로 가는 것"이라는 말을 거듭했다고 문학관은 전했다.
귀환까지는 7년이 걸렸다. 국립한국문학관은 법인 설립 직후인 2019년 심재호씨의 미국 자택을 방문하면서 자료 기탁 협의를 시작했다. 협의가 이어졌다 중단되기를 반복한 끝에 지난 6월 초 기탁약정서를 체결했고, 같은 달 23일 자료를 인수했다.
심훈은 1919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렀고 이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가·사상가들과 교류했다. 그의 문학에는 식민지 현실과 항일 민족의식이 짙게 배어 있다. 특히 '그날이 오면'은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는 열망을 격렬한 언어로 표현한 작품이다.
임헌영 국립한국문학관장은 '그날이 오면'에 대해 매천 황현의 '절명시'와 견줄 만한 일제강점기의 저항시라고 평가하며 이번 자료가 문학사뿐 아니라 독립운동사와 식민지 검열 연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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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한국문학관이 해외에서 한국문학 자료를 들여온 것은 2023년 일본의 한국문학 연구자 고(故) 오무라 마스오 교수 자료를 기증받은 데 이어 두 번째다. 현재 문학관이 수집한 자료는 약 12만점으로, 내년 4월 개관 이후 이번 심훈 자료도 순차적으로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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