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세니아가 지키기 어려운 규범이 된 이유
크세니아는 고대 그리스어로, 손님을 환대하는 규범이다. 낯선 이가 문 앞에 서면, 이름을 묻기 전에 씻을 물과 먹을 것을 내어줬다. 신원을 확인하고 환대할지 말지를 정할 수 없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오디세이'로 이 개념을 상기시킨다. 단순히 고전 취향 때문이 아니다. 오늘날 낯선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바뀌었다. 인사, 호의, 도움의 손길까지 정체가 확인되기 전에 의심하고 본다.
크세니아도 무조건적 선의를 요구하진 않았다. 다만 상대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 최소한의 존엄을 지켜야 인간 사회가 지탱한다고 봤다. 이는 순진한 이상주의가 아니라, 현실적인 생존 전략이었다. 항해와 교역이 삶의 기본이던 지중해에서, 오늘 맞이한 낯선 이가 내일 도착한 낯선 땅에서 주인일 수 있었다.
'오디세이'는 한 번 깨진 신뢰는 회복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트로이 목마로 보여준다. 신에게 바치는 선물이라는 명분으로 성문을 열게 만들지만, 그 안에선 병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뒤 어떤 손님도 안심하고 맞이하긴 어려워졌다. 한 번의 배신이 다음 백 번의 호의를 의심하게 했다.
이 붕괴는 신화 속 사건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지금의 분쟁에서도 이어진다. 이웃이던 존재는 한순간 적으로 불리고, 개별 인간이던 존재는 통계 속 숫자로 축소된다. 상대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순간은 크세니아가 지켜온 최소한의 약속이 무너진 뒤다. 폭력은 그 빈자리에서 손쉽게 정당성을 얻는다.
물론 크세니아가 낭만적으로만 작동한 건 아니다. 원작 '오디세이아'는 그 실패담으로 가득하다. 헬레네 납치는 손님으로 초대받은 자가 주인의 신뢰를 배신한 사건이었다. 키클롭스는 손님을 잡아먹는 방식으로 환대의 규범을 뒤엎었다.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은 주인이 없는 집에 눌러앉아 재산을 축내며 환대를 착취했다. 크세니아가 강조된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것이 늘 쉽게 무너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도 마찬가지다. 환대를 이야기하지만, 난민, 이주 노동자 등 실제로 낯선 존재 앞에서 먼저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드물다.
그 책임은 애초 한쪽만의 몫이 아니었다. 환대는 일방적 시혜가 아니라 상호 의무였다. 손님은 주인의 집에서 예의를 지켜야 하고, 주인은 손님을 학대하거나 이용해선 안 됐다. 이 쌍방향성은 지금의 논쟁에서도 유효하다. 낯선 이를 받아들인 사회는 최소한의 존엄을 보장할 책임이 있고, 동시에 받아들여진 이는 그 사회의 질서를 존중할 책임이 있다. 어느 한쪽만 강조되는 순간 크세니아는 무너진다.
여기서 하나 더 짚을 지점이 있다. 크세니아는 이 상호 의무가 시간이 지나면 결국 확인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손님은 언젠가 이름을 밝히고, 주인은 언젠가 그 은혜를 돌려받는다. 오늘날 이 전제는 자주 성립하지 않는다. 관계는 대부분 한 번으로 끝나고, 호의를 갚을 상대를 다시 만날 일은 드물다. 하지만 보답이 사라진 자리에서 환대는 진짜 성격을 드러낸다. 되돌아올 것을 계산하고 베푼 호의는 사실상 거래에 가깝다. 되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베푸는 순간에야, 크세니아는 비로소 원래의 의미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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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존재를 처음 마주하는 그 짧은 순간, 우리는 무엇을 기본값으로 삼고 있는가. 의심인가, 최소한의 존중인가. 3000년 전 그리스인들은 그 답을 종교적 언어로 포장했다. 낯선 이가 변장한 신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섞인 믿음으로. 우리에게 그런 신화적 장치는 없다. 그럼에도 낯선 존재를 만나는 순간의 선택이 결국 그 사회 전체의 성격을 결정한다는 사실만큼은, 3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문을 열지 말지를 고민하는 그 찰나가, 매번 새로 쓰이는 우리 시대의 크세니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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