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동결자산 해제까지 요구
호르무즈 재개방 기대 후퇴
트럼프 출구전략 난항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의 전제조건으로 미국에 중동 주둔 병력 철수와 전쟁 피해 배상, 제재 해제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핵 합의 대신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을 성과로 내세워 이란 전쟁의 출구를 모색하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구상에도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9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이란 국영 IRNA통신 등에 따르면 이란 최고국가안보회의(SNSC)의 모하마드 바게르 졸가드르 사무총장은 전날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을 위한 요구사항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이란은 미국이 이란에 대한 해상 봉쇄를 해제하고 이란 주변 지역에서 해군과 공군 등 병력을 철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대이란 제재를 종료하고 해외에 동결된 이란 자산도 조건 없이 해제하라고 촉구했다.
미국이 이란을 상대로 벌인 전쟁으로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는 배상금 지급을 요구했다.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예멘, 이라크 등 역내 이란 동맹세력에 대한 군사행동을 중단하고 이란에 대한 위협과 모욕도 멈추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졸가드르 사무총장은 "미국이 행동을 바로잡을 때까지 호르무즈 해협은 재개방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란, 선 제재 해제 요구…IRGC 호르무즈 통제권 재확인
이번 요구는 앞서 미국과 이란이 합의한 종전 양해각서(MOU)보다 한층 강경해진 것이다. 당시 MOU에는 미국이 최종 핵 합의 일정에 맞춰 대이란 제재를 종료한다는 내용이 담겼지만, 이란은 이번에는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에 앞서 미국이 먼저 제재를 해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이란의 요구 강화로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 협상도 다시 난항에 빠질 가능성이 커졌다. 이란과 호르무즈 해협을 마주한 오만은 최근 상선이 안전하게 통항할 수 있는 항로의 지리적 좌표 등에 의견을 모으고 공동성명 작성을 진행해왔다.
최종 합의에 근접한 것으로 알려지며서 해협 재개방 기대가 커졌지만, 이란은 실제 해협 재개방 여부는 결국 미국의 태도에 달려 있다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아바스 아라그치 이란 외무장관은 이날 테헤란에서 기자들과 만나 "우리는 지금 미국과 협상하고 있지 않다"며 "중재자를 통한 메시지 교환은 있지만 이것을 협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그는 중재국들이 협상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도 "미국이 MOU 위반 행위를 멈추고 위반 사항에 대해 배상할 때까지 협상이 재개될 가능성은 없다"고 강조했다.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도 미국이 이란의 조건을 받아들일 때까지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종전 출구 찾는 트럼프…이란 강경 입장에 셈법 복잡
이란이 조건을 대폭 강화하면서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을 전쟁의 출구로 활용하려던 트럼프 대통령의 셈법도 복잡해졌다. WSJ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수주 동안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완전히 재개방할 경우 이를 전쟁의 승리로 선언하는 방안을 검토해왔다. 고위 참모들에게는 이란과 핵 합의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전쟁에서 손을 뗄 수 있다는 뜻도 사적으로 내비친 것으로 전해졌다.
백악관은 지난 4월 이후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협상의 핵심 목표로 내세웠지만 핵 문제에서 돌파구를 찾기 어려워지자 최근에는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에 무게를 두기 시작했다.
미국이 지난해 이란의 주요 핵시설 3곳을 파괴한 만큼 당분간 이란이 핵 프로그램을 재건하기 어렵고, 재건 움직임이 나타나더라도 미국 정보당국이 이를 포착할 수 있다는 게 트럼프 대통령의 판단이라고 WSJ는 전했다. 호르무즈 해협 통행만 정상화된다면 현재의 휴전을 장기간 유지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높은 에너지 가격이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을 끝낼 명분을 찾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란 역시 트럼프 대통령이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과 전쟁 종식을 원한다는 점을 협상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다는 평가다.
다만 양측의 입장 차는 여전히 크다. 미국은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상선에 통행료를 부과하거나 선박 통행을 사실상 통제하는 방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란은 미국 군함의 해협 통과에도 반대하고 있다. WSJ는 이란이 미국의 병력 철수와 제재·해상봉쇄 해제, 동결자산 해제, 전쟁 배상 등을 한꺼번에 요구하면서 협상 문턱을 크게 높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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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 야쿠비안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중동 프로그램 국장은 WSJ에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에 대한 이란의 최근 강경한 요구는 트럼프 대통령이 체면을 살리면서 분쟁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만들어내는 일을 갈수록 어렵게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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