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만2000여명 난민 한꺼번에 몰려와
흔들리는 '솅겐협정'…반이민정서 고조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
■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박수민 PD
■ 출연 : 이현우 기자
북아프리카 모로코와 맞닿은 스페인 영토 세우타에서 모로코 난민 7만여 명이 한꺼번에 불법 월경을 시도하다 스페인 군경에 제지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의 밀입국 시도에 전 세계가 술렁였고, 이 장면은 그동안 유럽에서 서서히 달아오르던 반이민 정서에 그대로 불을 붙였다. 유럽연합(EU)은 별도의 긴급회의까지 소집했고, 상당수 유럽 국가들이 스페인과의 국경 이동을 일시 차단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이 사태가 EU 내부의 균열로까지 번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며, 이 사건이 앞으로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경제난 극심해진 모로코…세우타로 몰려나간 난민들
발단은 모로코가 오랫동안 앓아 온 경제난과 실업 문제가 한꺼번에 곪아 터진 데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모로코는 최근 7년에 걸쳐 극심한 가뭄에 시달려 왔다. 특히 이번에 유럽을 강타한 유례없는 폭염은 아프리카에서 북상한 매우 강력한 열대 고기압 탓이었는데, 지구온난화의 여파로 이 열대 고기압이 지나치게 강해지면서 모로코는 농사철마다 가뭄에 발목을 잡히는 처지가 됐다. 그 결과 식량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졌다.
여기에 경제난이 겹쳤다. 모로코는 아프리카에서 다섯 번째로 큰 경제 규모를 자랑할 만큼 그나마 형편이 나은 나라였지만, 최근 들어 그 여유마저 무너졌다. 원래 모로코 출신 학생들은 상당수가 스페인이나 남유럽 국가를 발판 삼아 IT 업계에 취업해 왔는데, 생성형 인공지능(AI)이 등장한 이후 이 취업 통로가 대거 막혔다. 유럽 기업들이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나서면서 신규 채용 문이 좁아진 탓이다. 그러다 보니 모로코의 청년 실업률은 30%를 넘어설 만큼 치솟았고, 지난해 9월부터는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이어 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폭발 직전의 분위기 속에서 불씨를 당긴 것은 뜻밖에도 한 편의 SNS 게시물이었다. 모로코의 한 학생이 세우타를 통해 스페인으로 들어가겠다는 글을 올렸는데, 그 밑에 "스페인은 친이민 정책을 펴는 나라라서 국경만 넘으면 체류가 인정될 것"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댓글로 달렸다. 이 그릇된 정보에 청년층이 크게 고무됐다. 삽시간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세우타로 향하기 시작했고, 지난달 30일 마침내 7만 2,000명이 넘는 인파가 한꺼번에 몰려 불법 월경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세우타는 전체 인구가 8만 명 정도에 불과한 작은 도시다. 도시 인구에 맞먹는 인파가 국경으로 밀려든 셈이다.
수만 명이 한꺼번에 국경으로 쏟아지는 장면이 전 세계로 전파를 타면서 유럽 국가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2011년 이른바 '아랍의 봄'으로 불린 중동 시민혁명 시기, 수백만 명에 이르는 중동과 북아프리카 주민들이 바닷길과 육로를 가리지 않고 유럽으로 향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공포가 되살아나며 유럽인들을 다시 불안에 떨게 만든 것이다.
스페인과 관계악화된 모로코의 방조 의혹
그런데 통상 수만 명이 갑자기 국외로 탈출하려 하면 해당 국가가 이를 막는 것이 상식이다. 이 대목에서 모로코 정부가 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지에 의문이 쏠린다. 실제로 이 문제 때문에 이번 사태의 진짜 배후가 모로코 정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모로코가 경제난을 겪고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아프리카에서는 잘사는 축에 들고, 18만 명에 이르는 정예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웬만한 유럽 국가보다 군대 규모가 큰 나라다. 그런 나라가 대규모 자국민 탈주를 막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석연치 않다는 지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각에서는 모로코 정부가 일부러 세우타 국경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 준 것이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는다. 최근 모로코와 스페인의 관계가 크게 틀어진 상황에서, 이번 사태를 이용해 스페인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려 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두 나라 관계가 악화된 핵심 배경으로는 모로코 남서부에 위치한 서부 사하라 문제가 꼽힌다. 모로코는 이 지역이 원래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지만, 이곳 원주민들은 모로코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사하라 아랍 민주공화국이라는 독자 정부를 세웠고, 수십 년째 모로코와 대치하고 있다.
서부 사하라는 원래 스페인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했으나, 모로코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며 대부분 지역을 군대로 점령한 상태다. 이 지역에서 화학비료의 주원료인 인산염이 대량으로 나오는 까닭에, 모로코뿐 아니라 이웃 알제리도 이곳을 병합하고 싶어 하는 형국이다. 스페인 정부는 이 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 오랫동안 중립을 지켜 왔지만, 2022년부터 사하라 아랍 민주공화국 세력을 지지하기 시작하면서 모로코의 강한 반발을 샀다. 게다가 스페인이 알제리와도 관계 개선에 나서자 모로코와의 사이는 한층 더 벌어졌다. 이 때문에 이번 세우타 월경 사태 역시 모로코 정부가 의도적으로 방조해 스페인의 유럽 내 고립을 유도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결국 이 사건은 단순한 불법 밀입국 시도가 아니라 복잡한 국제관계가 얽힌 문제였던 셈이다.
스페인에 문 걸어잠그는 유럽…흔들리는 솅겐협정
그렇다면 유럽 국가들이 일제히 스페인을 향해 빗장을 걸어 잠근 이유는 또 무엇일까. 이는 현재 스페인을 이끄는 페드로 산체스 총리와 그 내각이 앞서 내놓은 친이민 정책을 철회하도록 압박하기 위한 성격이 짙은 것으로 알려졌다. 산체스 총리는 친이민 정책의 일환으로, 자국 내에 머물고 있는 불법 이민자와 망명 신청자 50만 명에게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부여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 정책은 이렇게 유입된 인력들이 주로 범죄나 노동 착취에 악용되고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스페인 내각의 조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우파 정권들은 이에 거세게 반발해 왔다. 그런 와중에 세우타 사태가 터진 것이다. 이런 일까지 벌어진 마당에 친이민 정책을 유지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순식간에 힘을 얻었다. 그 결과 상당수 유럽 국가가 스페인과의 국경 개방 조약인 솅겐 협정을 한시적으로 중단했고, 일부 국가는 아예 스페인을 솅겐 협정 대상국에서 퇴출시키자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솅겐 협정은 EU 회원국을 묶는 핵심 조약인 만큼, 여기에서 퇴출된다는 것은 사실상 EU에서 쫓겨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스페인 정부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일부 유럽 국가의 반발은 이해하지만 오해가 지나치다는 것이다. 지금 추진하려는 친이민 정책은 어디까지나 이미 들어와 피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법이라는 게 스페인 측 입장이다. 또한 과거에도 수천, 수만 명 규모로 세우타 밀입국 시도가 있었는데 그때는 잠잠하다가 왜 이번에만 유독 크게 부각되느냐고 항변한다. 실제로 세우타로 대규모 난민 행렬이 몰려왔다가 군경에 밀려난 일은 2010년대 이후 여러 차례 반복됐다. 그러나 당시 유럽 국가들은 하나같이 이를 스페인 내정으로 치부하며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이번처럼 7만 명 이상이 한꺼번에 넘어온 것은 규모 면에서 사상 최대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10여 년간 무관심으로 일관하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데 대해 스페인 정부는 강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문제는 이런 사태가 반복될 경우 유럽 각국의 안보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는 점이다. 벌써부터 이러한 공포 심리를 파고들어 유럽 각국의 극우 정당들이 강도 높은 반이민 정책을 쏟아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가뜩이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에 대한 공포가 커진 상황에서 북아프리카 난민 문제까지 겹치자, 자칫 EU가 깨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제기된다.
특히 동유럽 국가들이 서유럽의 친이민 정책과 인권을 앞세운 EU 집행부의 이민자 배려 정책에 격렬히 반발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수백만 명의 이슬람 난민이 국경 지대로 밀려든 경험이 있고, 그 난민들 틈에 테러리스트가 숨어들어 실제 피해를 입은 기억까지 안고 있다. 여기에 더해 최근에는 러시아에서 징병과 전쟁을 피해 왔다는 난민들 사이에 러시아 스파이가 상당수 섞여 있다는 점도 경계심을 키운다. 몰도바나 발트 3국처럼 러시아와 인접한 나라에서는 이런 스파이들이 금권 선거를 노리고 대놓고 자금을 뿌리다 경찰에 붙잡히는 일까지 벌어졌다.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단독]"강경화 초치" 장관 말실수 덮으려…외교부,...
이런 흐름이 이어지면 결국 솅겐 조약은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다. 예전처럼 EU 회원국들이 다시 국경 검문소를 대거 세우고 자유로운 이동을 억제하기 시작하면, EU가 사실상 쪼개지거나 아예 해체 수순을 밟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더 심각한 문제는 EU가 흔들리면 안 그래도 미국의 지원이 줄고 있는 유럽 안보에 큰 차질이 생긴다는 데 있다. 지금은 나토 회원국들이 무기와 물자, 군사 수송을 주고받을 때 솅겐 조약 덕분에 국경 통과가 수월했고 합동 작전도 손쉽게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체제가 무너지면 공동 안보 체제를 구축하는 일 자체가 한층 더 어려워진다.
그리고 이 모든 균열에서 가장 큰 이익을 챙기는 쪽은 결국 러시아라는 분석이 뒤따른다. 그런 만큼 EU의 결속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여러 대책도 모색되고 있지만, 지금의 분위기 속에서는 그마저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짙게 깔려 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