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패권 500년
세계 경제사는 승자의 연대기가 아니라, 힘의 원천이 바뀌는 순간마다 다시 쓰인 장부에 가깝다. 김정호는 16세기 대항해시대부터 AI 혁명까지 500년의 경제 패권을 스페인·영국·미국·중국 같은 국가의 흥망만으로 보지 않는다. 석유, 반도체, 조선업, 방산, 원전, 달러라는 여섯 개의 열쇠를 통해 부와 권력이 어떻게 이동했는지 추적한다. 몽골제국의 몰락과 해상 패권, 산업혁명과 세계대전, 브레턴우즈와 달러 질서까지 훑는 구성은 방대하지만, 질문은 비교적 분명하다. 한 시대를 지배한 나라는 무엇을 먼저 장악했는가.
책의 속도는 빠르고 시야는 넓다. 반도체를 '노예 부품에서 전략 자산'으로, 석유를 에너지보다 외교의 무기로, 달러를 무너지지 않는 제국의 언어로 읽는 대목은 지금의 한국 독자에게도 직접적이다. 다만 500년의 세계사를 한 권에 넣다 보니 각 지역의 균열과 예외는 과감히 접히고, 패권의 논리가 때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단일 렌즈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미중 갈등과 K-반도체, K-조선, K-방산을 따로 보던 시선을 하나의 긴 역사 위에 올려놓게 한다는 점에서 효용이 있다. 지금의 산업 뉴스가 실은 오래된 패권 경쟁의 다음 장면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김정호 지음ㅣ보다나은)
결정의 과학
후회는 대개 결정이 끝난 뒤에 찾아와 자신이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군다. 정훈은 "그때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라는 익숙한 자책을 행동경제학, 경영학, 심리학, 데이터 과학의 언어로 분해한다. 옐로스톤 대화재, 검사의 오류, 생존 편향, 치킨게임, 집단사고, 시장 개입 실패 같은 사례를 따라가다 보면 잘못된 판단은 무지보다 착각과 과신에서 더 자주 출발한다. AI 전공으로 기술경영학 박사학위를 받고 금융권 데이터 분석과 AI 모델 개발을 해온 저자의 이력도 이 책의 방향을 설명한다. 판단은 감의 문제가 아니라, 오류를 줄이기 위한 절차의 문제라는 것이다.
읽다 보면 결정이란 결단력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능력에 가까워진다. 책은 예측을 당위로 착각하지 말 것, 깊은 몰입이 오히려 시야를 좁힐 수 있다는 것, 결정권자를 견제하지 못하는 조직이 얼마나 쉽게 비극으로 가는지 짚는다. 공공정책부터 기업 전략, 투자 판단까지 사례의 폭이 넓어 다소 교과서적으로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그러나 AI가 추천하고 예측하고 요약하는 시대에, 인간에게 남는 일은 더 빨리 고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의심을 품는 일이라는 메시지는 선명하다. (정훈 지음ㅣ한국문화사)
번영의 대가
인류의 번영은 얼마나 많은 폐허 위에 세워졌는가. 수닐 암리스는 13세기 몽골제국의 확장부터 제국주의, 산업혁명, 세계대전, 화석연료와 도시화, 공중보건과 농업 혁신, 기후위기까지 800년 문명의 역사를 혁신과 파괴의 동시 진행으로 다시 쓴다. 발전은 언제나 진보의 얼굴만 하고 오지 않았다. 강을 오염시키고, 숲을 사라지게 하고, 동물과 타인의 자유를 착취 가능한 자원으로 바꾸는 과정도 함께 따라왔다. 책은 NPR 올해의 책, 브리티시 아카데미 북 프라이즈·데이턴 문학 평화상 수상작으로 소개되며, 40여 개 지도와 사진, 방대한 사료를 엮은 환경사의 큰 서사다.
두꺼운 책이지만 문제의식은 날카롭다. 인간은 자연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믿는 순간마다 더 큰 의존과 파괴의 체계 안으로 들어갔다. 천연두와 홍역 같은 전염병을 실은 정복선, 화석연료에 기대 불멸을 꿈꾼 제국, 세계 무역의 확대가 남긴 불평등과 생태적 비용이 한 흐름으로 연결된다. 기후위기를 오늘의 과학 뉴스가 아니라 문명의 습관으로 읽게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묵직하다. 번영의 역사를 자랑스럽게만 배워온 독자에게, 우리가 얻은 것의 가격표를 늦게라도 펼쳐 보인다. (수닐 암리스 지음ㅣ추선영 옮김ㅣ이봄)
인볼루션
더 달리면 앞서갈 수 있다는 약속이 깨진 뒤, 남는 것은 이상한 제자리걸음이다. 중국 청년들이 말하는 '내권'은 경쟁의 속도가 아니라 방향의 상실을 가리킨다. 공라오 컬렉티브는 채권 추심 업체 인턴, 학원 강사, 스트리밍 플랫폼 인턴, 자동차 회사 구매직, 유치원 강사와 마사지사를 거친 청년들의 목소리로 그 막막함을 기록한다. "공부만이 유일한 사다리"였던 세대가 졸업장과 인턴십, 996 노동과 무급의 굴레를 통과한 뒤 마주한 것은 더 넓은 선택지가 아니라 더 촘촘한 경쟁이었다.
'탕핑'은 게으름의 선언이 아니라, 더는 보상하지 않는 경주를 거부하는 낮은 자세다. 책이 중국 청년의 사례에 머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의 N포, 일본의 사토리 세대, 서구의 조용한 퇴사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갖고 있지만, 모두 삶을 개선하지 못하는 노동과 성취의 피로 위에 서 있다. 이 책은 청년을 연민의 대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묻는다. 아무리 뛰어도 제자리라면, 문제는 뛰지 않는 사람에게 있는가, 아니면 달리기 자체를 강요하는 구조에 있는가. (공라오 컬렉티브 지음ㅣ홍명교 옮김ㅣ날)
잘못한 인사
조은의 시에서 인사는 자주 어긋난다. 누군가를 알아본 줄 알았는데 아니고, 모른 척한 줄 알았는데 오해가 된다. 그 작은 엇갈림이 시집 전체의 정서가 된다. 198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은 8년 만에 나온 신작으로, 51편의 시를 4부로 묶었다. 「우리가 여기 앉아」의 긴 침묵, 「여우비」의 요가 수업과 노년의 몸, 「타인의 행복」의 눈부심과 어두운 옆자리처럼 시는 삶의 정면보다 비껴난 자리에서 오래 머문다.
좋은 시집은 크게 말하지 않고도 오래 불편하다. 『잘못한 인사』의 문장들은 용서와 우울, 늙음과 회복을 쉽게 미화하지 않는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늘을 살아야겠어"라고 말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화자는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자리에 선다. 그 애매한 자리야말로 조은의 힘이다. 삶을 정확히 이해하는 순간은 대개 착각과 엇갈림 속에서 온다. 이 시집의 인사는 잘못 건네졌지만, 그 잘못 덕분에 우리는 오래 피했던 생의 얼굴을 다시 본다. (조은 지음ㅣ문학과지성사)
조선범죄실록
조선은 예의와 도덕의 나라였다는 익숙한 표면 아래, 훨씬 거칠고 잔혹한 얼굴을 숨기고 있었다. 정명섭은 명예살인, 보복살인, 도박, 위조, 납치와 유괴, 조직폭력, 과거시험 부정행위까지 조선의 범죄 기록을 사료 속에서 건져 올린다. 특히 1533년 한양에서 두 발이 잘린 채 발견된 아이 개춘의 사건처럼, 책 속 범죄는 기이한 야담이 아니라 제도와 신분, 빈곤과 폭력이 뒤엉킨 사회의 단면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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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를 끄는 것은 범죄의 자극성만이 아니다. 범죄는 언제나 그 사회가 무엇을 금지했고, 무엇을 방치했으며, 누구의 고통을 쉽게 처리했는지를 드러낸다. 『조선범죄실록』은 조선을 낭만적인 전통 사회로 소비하는 시선에서 벗어나, 법과 질서가 미처 닿지 못한 골목과 시장, 시험장과 관아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역사책이면서 범죄 르포처럼 읽히는 까닭은 분명하다. 인간의 욕망과 폭력은 왕조가 바뀌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기록은 그 잔혹한 반복을 조용히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정명섭 지음ㅣ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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