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진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
"연구비만큼 중요한 건 연구 생태계…노벨상은 목표 아닌 결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2024년도 연구개발활동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은 2024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비중이 5.13%로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다. 하지만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는 아직 없다.


정진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사진)은 지난달 30일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그 간극의 원인을 연구비의 규모가 아닌 연구 생태계에서 찾았다. 그는 "노벨상을 원한다면 먼저 노벨상급 연구가 나올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야 한다"며 "오늘의 노벨상은 20~30년 전 축적된 연구 환경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말했다.

정진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이 지난달 30일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회관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공

정진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이 지난달 30일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회관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공

AD
원본보기 아이콘

연구비보다 중요한 것은 연구비를 쓰는 방식


우리나라는 R&D 투자 규모만 놓고 보면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투자 규모와 노벨상 성과는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예산의 총액보다 어떤 연구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연구를 맡길 것인가라는 게 정 원장의 진단이다.

정 원장은 일본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 우리나라가 아직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한 반면 일본은 자연과학 분야에서 25명(역대 29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그는 "지금 일본의 연구 환경이 우리보다 낫다는 의미는 아니다"라며 "오늘날 일본이 거두는 성과는 30년 전 연구 생태계가 만든 축적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한림원장 취임 과정에서 350명이 넘는 석학을 만나며 그가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연구비를 쫓아다니느라 연구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평생 연구하고 싶은 주제보다 정부 예산이 배정된 분야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는 세계적인 발견이 나오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세계 2위 R&D 투자에도…과학 노벨상은 '0명'[사이언스스코프] 원본보기 아이콘

정 원장은 "연구비를 얼마나 지원하느냐보다 연구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한 주제에 몰입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며 "도전적인 시도가 지속될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것이 결국 세계적인 성과로 이어진다"고 역설했다. 이어 "1997년 창의적연구진흥사업과 1999년 국가지정연구실(NRL) 사업은 젊은 연구자에게 장기간 연구비와 자율성을 보장했던 대표적인 성공 사례"라며 "새로운 사업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왜 그때는 가능했고 지금은 어려워졌는지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20년을 기다리는 연구가 노벨상을 만든다


정 원장은 노벨상을 단기간에 만들어낼 수 있는 정책 목표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단기 성과에 집착하기보다 오랜 연구의 결실을 기다릴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어떤 연구 환경을 만드느냐가 20~30년 뒤 대한민국 과학의 수준을 결정한다"며 "노벨상은 목표가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연구의 결과"라고 말했다.

그는 연구 초기에는 활용 가능성이 불분명하거나 실패 위험이 크더라도 의미 있는 질문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는 연구 환경이 중요하다고 했다. 단기간의 논문 수나 특허 건수로 연구를 평가하기보다 연구자가 한 가지 질문을 오랫동안 발전시킬 수 있도록 장기적인 지원과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 원장은 "한 연구자에게 연구비를 무기한 보장하자는 뜻이 아니다"라며 "짧은 성과를 반복적으로 요구하는 대신 연구자가 의미 있는 질문을 끝까지 밀고 갈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몇몇 대학만으로는 안 된다…지역대학에도 노벨상 씨앗 심어야

정 원장은 우리나라 연구 경쟁력을 높이려면 일부 대학과 연구기관에 역량이 집중된 구조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진단했다. 세계적인 성과는 소수 기관이 자원과 인재를 독점하는 체제보다 서로 다른 연구 전통과 질문이 공존하는 생태계에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는 "노벨상은 특정 대학 한 곳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연구 거점에서 서로 다른 질문과 연구 전통이 오랜 시간 축적될 때 나오는 결과"라며 "지역에서도 세계 수준의 연구가 나올 수 있는 기반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정진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이 지난달 30일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회관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공

정진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이 지난달 30일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회관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공

원본보기 아이콘

지역대학의 연구 기반이 약해지면 국가 전체의 인재 양성 경로도 좁아진다. 우수한 학생과 연구자가 수도권으로만 몰리면 지역 연구실은 후속 세대를 확보하기 어려워지고, 지역 산업과 연계된 연구 기반도 함께 약화된다.


그렇다고 연구비를 대학별로 일률적으로 나누자는 뜻은 아니다. 연구 역량과 잠재력을 갖춘 연구자에게는 지역과 소속을 가리지 않고 투자하되, 지역에서도 연구팀과 연구 인프라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 원장은 "이미 앞서 있는 대학 몇 곳을 더 키우는 것보다 서로 다른 강점을 가진 연구 거점을 전국에 만드는 것이 대한민국 연구 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좋은 연구가 세계로 가는 통로도 만들어야


정 원장은 뛰어난 연구 성과가 세계 학계에서 충분히 검증되고 확산될 수 있는 통로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벨상은 한 편의 논문이나 단일 성과에서 나올 수 없다. 후속 연구가 이어지고 다른 연구자들이 그 의미를 확인하면서 학문적 영향력이 축적돼야 가능해진다. 국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계 연구자들이 성과를 인용하고 새로운 연구의 출발점으로 활용하며, 국제학회와 공동연구를 통해 학문적 가치를 검증해야 한다. 연구 성과가 세계 학계의 공통 언어와 문제의식 속으로 들어가야 새로운 분야를 연 연구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 원장은 우리나라 연구자들의 역량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와 있지만 국제 학술 네트워크와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노벨상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아래 단계의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학술상을 꾸준히 받는 것이 중요하다"며 "세계 과학계에서 연구자의 이름과 성과가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검증되는 과정이 결국 노벨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인다"고 말했다.


한림원도 국내 연구자들을 해외 권위 있는 국제학술상 후보로 꾸준히 추천하고 있다. 정 원장은 "추천 대상과 수상 여부는 공개하지 않는다"며 "과도한 경쟁이나 이해관계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국제적 관행"이라고 했다.

정진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이 지난달 30일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회관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공

정진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이 지난달 30일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회관에서 아시아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공

원본보기 아이콘

연구자가 국제학회에서 주요 역할을 맡고 해외 연구자를 국내로 불러들여 공동연구를 이끄는 한편, 세계 학계가 주목하는 연구 의제를 먼저 제시해야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학술상을 육성하는 일도 이런 생태계의 한 축이 될 수 있다. 정 원장은 "권위 있는 국제 학술상은 세계적인 연구자들이 한국을 찾고 국내 연구자들과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드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노벨상을 목표로 삼기보다 세계 과학계에서 인정받는 연구를 꾸준히 축적하는 것이 먼저"라며 "국제사회가 자연스럽게 주목하는 연구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량 지표 대신 실패를 견디는 시간 필요

정 원장은 과학기술 정책의 평가 기준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는 연구비 투입 규모와 논문·특허 건수가 주요 성과로 제시됐다면, 앞으로는 새로운 연구 분야를 열었는지, 젊은 연구자를 길러냈는지, 후속 연구가 지속되고 있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고 했다.


실패한 연구도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과 연구자를 남겼다면 의미가 있다. 반대로 계획한 목표를 달성했더라도 기존 지식을 반복하거나 후속 연구로 이어지지 못했다면 세계적인 성과로 평가하기 어렵다. 성공 가능성이 높은 연구만 골라 지원하는 체제에서는 누구도 실패 위험이 큰 질문에 도전하지 않게 된다는 게 그의 우려다.


정 원장은 젊은 연구자들에게도 자신만의 질문을 끝까지 붙들라고 당부했다. 그는 "AI가 순식간에 답을 내놓는 시대일수록 무엇을 물을 것인가를 정하는 일은 오로지 사람의 몫"이라며 "실패했다는 이유로 질문까지 놓지 말고, 그 질문에 다가가는 방법을 바꿔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이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몰입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좋은 연구가 이어질 때 노벨상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가 된다"고 강조했다.


한국 과학에 부족한 것은 연구비의 절대 규모가 아니다. 실패를 견디는 시간, 연구자가 질문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 안정성, 지역과 소속을 넘어 인재를 키우는 다양성, 그리고 좋은 연구를 세계와 연결하는 통로다.


■ 정진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은?

서울대 제약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생명약학 석사,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독성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8년부터 2021년까지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명예교수다.


독성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로 화학물질 위해성 평가와 심혈관 독성 연구를 개척했다. 2008년 독성학 분야 국제학술지 'Chemical Research in Toxicology' 창간 20주년 기념 특집호 표지 인물로 선정됐고, 2013년에는 아시아 독성학자 가운데 두 번째로 세계독성학회(ICT) 개막식에서 다이크만 수상 강연을 했다. 2021년 과학기술훈장 진보장을 받았다.

AD

서울대 약학대학 학장과 환경안전원장,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총괄부원장을 지냈으며, 국회 가습기살균제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전문위원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민생활과학자문단 단장 등을 역임했다. 2025년 제11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에 취임했다.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놓칠 수 없는 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