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뉴 데이'가 그린 성과 사회의 얼굴
몸이 보내는 경고도 약으로 버티는 히어로
그를 구한 건 성과가 아니라 수용이었다

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스틸 컷.

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스틸 컷.

AD
원본보기 아이콘

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에서 피터 파커(톰 홀랜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이 기억하는 건 스파이더맨뿐이다. 마법으로 지워진 이름이 돌아오지 않았다. 연인 MJ(젠데이아 콜먼)도, 절친 네드(제이콥 배덜런)도 그를 몰라본다. 남은 건 도시를 지키는 일뿐이다.


이례적인 설정이다. 슈퍼히어로는 통상 혼자가 아니다. 파트너와 팀을 이루고, 연인과 일상을 나눈다. 피터에게 사적 유대는 없다. 업무상 접촉만 있을 뿐이다. 진 드울프(리자 콜론자야스)·옐레나 벨로바(플로렌스 퓨)와 정보를 교류하고, 퍼니셔(존 번탈)와 대립하면서도 손을 잡는다. 협업 상대는 늘었지만, 그중 누구도 스파이더맨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거미 슈트를 입은 영웅으로만 대한다. 사람은 사라지고 역할만 남았다.

따지고 보면 현대인의 자화상에 가깝다. 규율사회의 복종적 주체는 어느새 성과사회의 성과 주체로 바뀌었다. 평생직장이 사라지고 자기 계발이 생존 조건이 되면서, 통제가 외부의 감시가 아니라 개인의 열망으로 옮아갔다. 명령하는 타자는 사라졌다. 대신 스스로를 경영하고 채찍질하는 자기 착취가 그 자리를 채운다. 피터가 매일 밤 순찰을 나서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누구도 강제하지 않는데, 멈추지 못한다.


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스틸 컷.

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스틸 컷.

원본보기 아이콘

그 대가는 몸으로 고스란히 돌아온다. 극심한 두통과 부상에도, 진통제 몇 알로 버틴다. 거미 유전자가 폭주할 때는 스스로 제작한 억제 장치를 가동한다. 몸이 보내는 경고를 알면서도 일을 놓지 못하는 번아웃 직전의 직장인을 닮았다.

그렇게 몸을 갈아 넣어도, 피터를 온전히 기억하는 존재는 없다. 타인의 의식에 침투해 감정을 조종하는 진 그레이(세이디 싱크)만이 예외다. 세상이 지운 이름을, 하필 그를 파괴하려는 자가 붙들고 있다. 어쩌면 당연하다. 진 역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세상을 갖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과로만 존재를 증명해온 사람에게 남은 건, 결국 자신을 노리는 시선뿐이다.


산전수전을 겪은 뒤 피터는 각성한다. 인위적으로 몸을 억누르는 대신, 상실과 고통을 스스로 받아들이며 변이를 온전히 다스린다. 사색적 삶과 무위의 가치를 체득하면서 몸도 관계도 스스로 제자리를 찾는다. 네드가 오래된 비밀 악수를 떠올리며 피터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마지막 장면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관계는 성과로 회복되지 않는다. 내려놓는 순간에야 돌아온다.

AD

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스틸 컷.

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스틸 컷.

원본보기 아이콘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 갈구하는 정서일지 모른다. 야근과 성과 지표가 일상을 지배하는 현실에서, 퇴근 뒤 남는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협업 채널은 늘어나는데 정작 자신을 알아보는 인연은 줄어드는 흐름도 낯설지 않다. 일이 곧 존재 증명이 돼버린 사람에게, 휴식은 죄책감의 다른 이름이다. 가장 화려한 가면을 쓴 인물조차 이 굴레를 벗어나는 데 필요했던 건 더 나은 성과가 아니라 수용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오래 곱씹을 만하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놓칠 수 없는 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