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호 '장례식 케이크 전문점 연옥당'
아이스너상 최우수 아시아 만화 미국판
텀블벅 4406%에서 9개국 수출
다크호스 영문판으로…국내 창작만화 첫 수상
죽은 사람은 49일 동안 드넓은 연옥의 벌판을 걸어야 한다. 산 사람은 긴 길을 떠난 이가 지치지 않도록 생전의 추억과 사랑을 담은 케이크를 주문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마지막 한 조각'을 굽는 한국 만화가 세계 만화계의 가장 높은 문턱을 넘어섰다.
만화가 산호의 장편 그래픽노블 '장례식 케이크 전문점 연옥당'이 미국 아이스너상의 '최우수 아시아 만화 미국판' 부문을 수상했다. 국내에서 창작·출간된 한국 만화가 아이스너상 경쟁 부문에서 수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이스너상을 주관하는 코믹콘 인터내셔널은 지난 24일(현지시간) 미국 샌디에이고 힐튼 샌디에이고 베이프런트 호텔에서 제38회 윌 아이스너 코믹 산업상 시상식을 열고 32개 부문의 수상작을 발표했다. '장례식 케이크 전문점 연옥당'의 영문판 'Purgatory Funeral Cakes'는 번역가 대니 림이 영어로 옮기고 미국 만화출판사 다크호스가 펴냈다.
'최우수 아시아 만화 미국판'은 아시아에서 출간된 만화를 영어로 번역해 북미 시장에 소개한 작품 가운데 한 편에 주는 상이다. 올해 산호의 작품은 일본 만화 '히라야스미'와 '랜드', '도쿄 에일리언 브라더스', 대만 만화 '옌' 등 4편과 경쟁해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원작뿐 아니라 미국 독자가 작품을 받아들이도록 한 번역과 편집, 제작의 완성도까지 함께 평가하는 부문이다.
이 부문은 오랫동안 일본 만화의 독무대에 가까웠다. 2010년 현재 명칭으로 개편된 뒤 2017년을 제외한 수상작이 모두 일본 작품이었다. 김동화의 '황토빛 이야기', 김금숙의 '풀', 연상호·최규석의 '지옥'이 각각 2010년과 2020년, 2023년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장례식 케이크 전문점 연옥당'은 망자를 위해 세상에 하나뿐인 케이크를 만드는 가게를 무대로 한다. 이승에 남은 사람들은 고인이 좋아했던 음식과 함께한 기억을 연옥당 주인 마고에게 들려준다. 완성된 케이크는 망자가 환생문에 닿을 때까지 49일을 버티게 하는 양식이 된다. 서로 다른 손님들의 애도와 상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치면서 마고와 유령차사 미로의 비밀을 장편 서사로 이어간다.
세계 무대로 향한 출발점은 대형 출판사나 웹툰 플랫폼이 아니라 크라우드펀딩이었다. 산호는 2019년 텀블벅에서 독립 단행본 제작을 위한 모금을 시작했다. 2505명이 참여해 목표액의 4406%인 8813만5000원이 모였다. 독자의 후원으로 태어난 작품은 2021년 문학동네에서 정식 단행본으로 출간됐고, 지난해 3권으로 완결됐다.
미국판은 지난해 11월 다크호스에서 출간됐다. 미국판의 저작권 정보에는 한국어 원작을 문학동네와 신원에이전시를 통해 계약했으며, 대니 림이 번역하고 마이클 하이슬러가 레터링을 맡았다고 적혀 있다. 한국에서 출발한 죽음과 환생, 49일의 세계관이 북미 그래픽노블 독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에 번역과 편집진의 작업이 더해졌다.
작품은 미국을 비롯해 대만과 일본, 러시아, 베트남, 폴란드, 튀르키예, 우크라이나, 프랑스 등 9개국에 판권이 수출됐다. 2022년 대한민국콘텐츠대상에서 한국콘텐츠진흥원장상을 받았으며, 산호는 '비와 유영',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 '유리병 속의 나나니' 등으로 작품 세계를 이어왔다. 영화 스토리보드 작업을 하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져 만화를 시작한 작가다.
문학동네 관계자는 "아이스너상은 하비상에 비해 심사 과정에서 작품의 대중성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북미 만화 시장에서 주류 작품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를 가진다"며 "이번 수상은 한국 만화계의 성장을 보여주는 쾌거"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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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제정된 아이스너상은 그래픽노블의 선구자로 불리는 미국 만화가 윌 아이스너의 이름을 딴 상이다. 심사위원단이 전년도 북미 출간작 가운데 후보를 추린 뒤 만화가와 편집자, 출판인 등 업계 관계자들의 투표로 최종 수상작을 결정한다. 앙굴렘국제만화축제상, 하비상과 함께 세계 만화계의 주요 상으로 꼽혀 '만화계의 오스카'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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