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희 '평화로운 가난 속에서 단정하게'
돈을 모으지 않는 삶은 해방인가, 특권인가
영화평론가 최광희가 봉천동 반지하로 돌아갔다. 이혼과 실직을 겪은 뒤 어머니가 남긴 집으로 들어갔다. 한 달 순수 생활비는 80만~100만원. 자동차와 골프, 저축을 내려놓고 돈이 생기면 아끼기보다 먼저 쓴다. 그렇다고 궁색하게만 살지는 않는다. 계절마다 해외여행을 떠나고, 독립영화를 위해 영화관을 대관하며, 베트남 청년에게는 매달 100달러를 후원한다. 가진 돈을 모두 쓰고 삶을 마무리하겠다는 사람. 대부분은 노후를 위해 돈을 모으지만, 그는 노후를 위해 오히려 돈의 힘을 줄이려 한다. 신간 '평화로운 가난 속에서 단정하게'가 불편하게 읽히는 이유다.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가난은 정말 평화로울 수 있을까. 가난에 단정함을 덧붙이는 순간 그것은 윤리인가, 미학인가, 아니면 낭만화인가. 책은 이런 의문을 외면하지 않는다. 최광희가 말하는 가난은 굶주림이 아니라 조장된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삶에 가깝다. 그래도 질문은 남는다. 그런 가난은 누구에게 가능한가. 이 책을 금욕주의 안내서가 아니라 축적 강박에 맞서는 한 개인의 반격문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 한국에서 이 질문은 결코 한가하지 않다. 2025년 65세 이상 인구는 전체의 20.3%로 처음 20%를 넘어섰고, 2036년에는 30%, 2050년에는 4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2023년 66세 이상 은퇴연령층의 상대적 빈곤율은 39.8%였다. 65세 이상 연금 수급률은 90.9%였지만 월평균 수급액은 69만5000원에 그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역시 한국의 66세 이상 상대적 소득빈곤율을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40% 수준으로 집계했다. 오래 살 가능성은 커졌지만, 오래 버틸 돈은 충분하지 않다. 이런 현실에서 "돈을 다 쓰고 죽겠다"는 선언은 누군가에게는 해방처럼,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모한 농담처럼 들린다.
그래서 이 책은 곧이곧대로 처방전이 될 수 없다. 최광희에게는 비록 반지하지만 돌아갈 집이 있고, 글을 쓰고 말하는 직업적 자본이 있다. 독립영화를 위해 극장을 빌리고, 프랑스 파리에서 영화 투어를 진행할 수 있는 문화적 자본도 갖고 있다. 그의 가난은 절대빈곤의 기록이 아니라 최소한의 주거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선택한 반축적의 실험이다. 이 차이를 지우는 순간 책은 위험해진다. 가난한 사람에게 마음가짐만 바꾸라고 말하는 책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쉽게 밀어낼 수 없는 이유는 최광희가 그 위험한 경계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부자들의 미니멀리즘처럼 말하지 않는다. 넓은 거실에서 비움을 권하거나, 고급 식탁에서 소박함을 소비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의 반지하는 실제 주소이고, 생활비 80만~100만원은 연출이 아니라 계산이다. 책의 목차 역시 집, 돈, 일, 불안, 늙음, 폭력,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돈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사람이 자기 삶을 함부로 미워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 시선을 옮긴다.
돈은 중요하다. 이 문장을 빼면 책은 금세 허공에 뜬다. 병원비와 난방비, 월세, 치아와 무릎, 돌봄은 마음가짐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한국의 65세 이상 고령자 1인당 진료비는 530만6000원이다. 65~69세 고용률은 2024년 기준 57%로 OECD 평균 26%를 크게 웃돈다. 일할 수 있어서 일하는 노년과 일하지 않으면 생계를 이어갈 수 없어 일하는 노년은 다르다. 영국 가디언은 한국의 임금피크제와 정년 제도가 고령 노동자를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으로 내몰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가난은 때로 생활철학이고, 때로는 하루의 노동이다. 폐지를 실은 손수레 앞에서 ‘평화로운 가난’이라는 말은 조금 더 조심스러워진다. 최광희의 책은 그 불편한 경계 위에서 돈과 노후, 품위의 문제를 다시 묻는다. 연합뉴스
원본보기 아이콘하지만 돈이 중요하다는 사실과 돈만이 삶의 유일한 설계도여야 한다는 주장은 다르다. 최광희는 바로 그 틈을 파고든다. 우리는 노후를 준비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불안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 모아야 한다. 더 벌어야 한다. 더 늦게 쉬어야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삶은 통장 잔고를 지키기 위해 소모되는 시간이 된다.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2025년 말 가계신용 잔액은 1978조8000억원까지 늘었다. 빚과 불안이 이만큼 커진 사회에서 "돈이 모이면 써서 없앤다"는 말은 불온하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래 귀에 남는다.
책의 말투는 때로 단호하고, 어떤 선언은 꽤 거칠다. "가진 게 많아지면 뇌가 썩는다"는 식의 문장은 통쾌하면서도 조심스럽다. 모두가 그렇게 살 수는 없고, 모두가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 책의 쓸모는 정답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남들처럼 살기 위해 끝없이 자신을 소진하는 삶이 정말 품위 있는 삶인지 묻는 데 있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부자 되세요"를 덕담처럼 주고받았다. 그 인사가 따뜻하게 들리는 동안 사람들은 가난하지 않기 위해 오히려 가난한 표정으로 살아왔다.
평화로운 가난 속에서 단정하게는 가난 예찬서도, 노후 자산관리서도 아니다. 차라리 자기 삶의 소비 속도를 늦춰본 사람의 불온한 생활비 명세서에 가깝다. 이 책을 읽고 모두가 반지하로 갈 필요는 없다. 저축을 끊을 이유도 없다. 다만 한 번쯤은 물을 수 있다. 내가 모으는 돈은 정말 나를 지키고 있는가. 아니면 나를 붙잡고 있는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진짜 가난인가, 아니면 남들처럼 보이지 못할 것이라는 수치심인가.
반지하는 낮다. 햇빛은 적고 습기는 쉽게 찬다. 그런데 최광희는 그 낮은 곳에서 이상하게도 위를 올려다보지 않는다. 남의 층수를 부러워하는 대신 자기 방의 크기를 다시 잰다. 그것이 이 책이 말하는 품위다. 가난을 아름답게 꾸미는 품위가 아니라, 더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삶을 함부로 미워하지 않으려는 품위. 돈이 부족한 사람은 많다.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은 돈 말고는 자신을 설명할 문장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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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가난 속에서 단정하게 | 최광희 지음 | 자크드앙 | 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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