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하는 미중 패권 전쟁과 대분열의 시대
세계화는 끝난 것이 아니라 갈라지고 있다. 닐 시어링은 미·중 패권 경쟁을 단순한 무역 분쟁이 아니라, 기술·금융·에너지·핵심 광물·공급망이 두 개의 질서로 재편되는 과정으로 읽는다. 한때 기업은 가장 싸고 빠른 길을 찾아 국경을 넘었지만, 이제 그 길 위에는 안보와 제재, 동맹과 진영의 표지판이 세워졌다. 효율을 좇던 세계 경제가 전략의 언어로 다시 짜이는 장면을 보여준다.
눈에 띄는 것은 탈세계화라는 익숙한 말보다 '분열'이라는 진단이다. 기업은 값싼 생산지를 고르는 데서 끝나지 않고 어느 블록에 설 것인지 선택해야 하며, 국가는 시장보다 전략을 앞세운다. 다가올 10년의 경제를 환율이나 성장률만으로 볼 수 없다는 경고가 선명하다. (닐 시어링 지음ㅣ임경은 옮김ㅣ21세기북스)
검은 유니콘
유니콘 기업의 성공담은 대개 투자 유치와 매각 금액으로 기억된다. 앤디 던은 그 빛나는 숫자 뒤에서 한 사람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정면으로 꺼낸다. 보노보스를 키워낸 창업자의 추진력은 제1형 양극성 장애와 맞물려 있었고, 회사가 커지는 동안 그의 삶은 점점 통제 불가능한 쪽으로 기울었다.
스타트업 세계는 흔히 미친 듯한 몰입과 과감한 결단을 미덕으로 포장한다. 이 회고록이 불편한 이유는 그 미덕의 언어가 한 인간의 고통을 얼마나 쉽게 가려왔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던은 창업 신화를 부수려는 냉소가 아니라, 그 신화를 너무 가까이서 통과한 사람의 목소리로 말한다. 회사는 성장할 수 있지만, 그 성장이 창업자를 구원하지는 않는다. 가장 높이 올라간 사람의 고백이 오히려 더 오래 버티는 법을 묻게 한다. (앤디 던 지음ㅣ박영준 옮김ㅣ상상스퀘어)
돈의 행성에서 살아남는 최소한의 경제학
경제학은 멀리 있는 학문처럼 보이지만, 사실 장바구니와 배달 앱, 집세와 은퇴 준비, 주말의 여가 속에서 매일 작동한다. NPR 경제 팟캐스트 '플래닛 머니'의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한 이 책은 일과 커리어, 가족, 저축과 투자, 여가의 장면에서 경제 원리를 풀어낸다.
딱딱한 수식과 그래프 대신 생활의 사례로 밀고 가는 방식은 입문서의 장벽을 낮춘다. 피클 가격, 재택근무, 보육비, 인덱스 펀드, 신용카드 포인트처럼 사소해 보이는 소재들이 결국 시장과 제도, 인센티브와 선택의 문제로 이어진다. 가벼운 구성 덕분에 깊은 경제 분석서와는 거리가 있지만, 그 가벼움이 오히려 장점이다. 경제를 전문가의 말이 아니라 일상을 해석하는 렌즈로 돌려놓는 책이다. (알렉스 마야시·알렉스 골드마크 지음ㅣ박누리·박상현 옮김ㅣ생각의힘)
죽도록 맞으며 살아왔다
폭력은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박형서는 해방 직후부터 오늘까지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의 시간을 액자소설과 피카레스크 형식으로 밀고 가며, 맞고 때리고 견디고 되갚는 인간들의 기이한 행렬을 펼쳐 보인다. 개인의 수난처럼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새 시대의 습관처럼 번지고, 폭력은 사건이 아니라 공기처럼 인물들을 둘러싼다. 끔찍한 연쇄를 다루면서도 문장은 무겁게만 가라앉지 않고, 익살과 알레고리, 냉소적 진지함 사이를 오간다.
648쪽의 장편은 쉽게 읽히는 분량은 아니지만, 박형서 특유의 이야기 밀도는 방대한 시간을 한 인간의 수난사로 좁혔다가 다시 한국 사회의 환부로 넓힌다. 제목의 노골성은 과장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 '맞으며 살아왔다'는 말은 개인의 고백이자, 아직 끝나지 않은 시대의 체감이다. (박형서 지음ㅣ문학과지성사)
상냥한 지옥
상냥하다는 말과 지옥이라는 말이 나란히 놓일 때, 삶은 가장 정확하게 불편해진다. 루마니아 출신 문화인류학자 이리나 그리고레는 사회주의 체제의 유년, 자본주의로의 전환, 일본 이주와 연구자의 삶을 모어가 아닌 일본어로 적는다. 가족 3대의 역사, 체르노빌의 그림자, 여성의 몸, 이주자의 감각이 뒤섞이며 개인의 기억은 곧 인류학의 현장이 된다. 이 책에서 고향은 돌아갈 수 있는 장소라기보다, 몸속 어딘가에 남아 계속 번역되는 감각에 가깝다.
책의 힘은 체제 비판보다 감각의 정확함에 있다. 산나물의 쓴맛, 꿈속의 개구리, 낯선 언어의 면역력 같은 사소한 장면들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고향과 타국, 몸과 역사를 잇는다. 자기 경험을 쓴 글이지만 자기연민으로 닫히지 않는다. 한 사람의 몸을 통과한 세계가 얼마나 많은 시대의 잔여물을 품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리나 그리고레 지음ㅣ김영현 옮김ㅣ다다서재)
언어존재론
언어는 어디에 있는가. 노마 히데키는 이 단순해 보이는 질문을 640쪽 끝까지 밀고 간다. 언어를 구조나 규칙, 기호 체계로만 다루는 대신 누군가 말하고, 듣고, 쓰고, 읽는 실제 현장인 '언어장'에서 다시 사유한다. 말은 머릿속에만 있지 않고, 문자는 종이 위에만 있지 않다. 언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실행될 때 비로소 사건이 되고, 그 사건 속에서 존재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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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과 밀도는 만만치 않다. 말해진 언어와 쓰여진 언어, 의미, 문장, 주어와 술어, 생략, 진위와 시제까지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을 계속 의심한다. 당연하다고 여긴 말의 질서가 하나씩 흔들릴 때, 독자는 언어를 도구가 아니라 세계가 열리는 방식으로 다시 보게 된다. '한글의 탄생'의 저자가 언어학의 가장 근본적인 자리로 돌아가 쓴 원리론이다. 어렵지만, 그 어려움은 말이라는 가장 익숙한 사물을 낯설게 보기 위해 필요한 비용에 가깝다. (노마 히데키 지음ㅣ김경원 옮김ㅣ연립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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