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고속도로·AI 전력수요 변수 반영
VPP·ESS 등 에너지 플랫폼 신사업으로 수익구조 전환 모색
정부가 3대 메가프로젝트서 밝힌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팹 4기)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전력수요는 총 24.7GW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팹 10기)에 필요한 전력(15GW)을 합하면 40GW에 육박한다. 이는 신형 원전(1.4GW) 28기 규모에 이른다. 전력 공급 뿐만 아니라 송배전 인프라와 계통 안정성까지 고려하면 한국전력의 역할이 커질 수 밖에 없다.
한전의 '2035 중장기 전략 롤링' 설문이 단순한 경영환경 진단을 넘어선 이유다. 전기를 사서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기존 사업모델만으로는 에너지고속도로 구축에 필요한 대규모 전력망 투자와 전력시장 개방, 인공지능(AI) 시대의 폭증하는 전력수요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이 담겼다. 발전공기업 재편 논의까지 본격화하면서 한전의 역할 자체를 다시 정의해야 한다는 인식도 엿보인다.
에너지고속도로가 바꾸는 한전의 역할
설문 문항은 한전을 둘러싼 주요 변화를 모두 '위협'과 '기회'로 구분돼 있다. 특히 한전이 가장 먼저 주목한 변화는 새 정부의 에너지 정책이다. 에너지고속도로 구축과 재생에너지 확대, 탄소중립 이행이 본격화되면서 기존 전력산업의 역할도 크게 달라질 것으로 내다봤다. 대규모 송전망 투자와 계통 운영의 복잡성이 커지는 것은 부담이지만, 국가 에너지정책을 실제 현장에서 집행하는 핵심 기관으로서 한전의 위상은 더욱 커질 수 있다는 판단이다.
에너지고속도로가 현실화하면 한전은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단순히 전달하는 송·배전 사업자를 넘어 재생에너지와 분산자원, 국가첨단산업단지를 하나의 계통으로 연결하는 국가 전력망 운영자의 성격이 한층 강해질 전망이다. 결국 한전의 경쟁력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전기를 판매하느냐'보다 '늘어나는 전력망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구축·운영하고 그 위에서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느냐'에 달릴 가능성이 크다.
AI 시대…전력망이 곧 산업 경쟁력
AI 산업의 성장은 한전의 부담과 기회를 동시에 키우는 변수다.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안정적인 전력공급 능력이 국가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대규모 전력수요가 수도권과 특정 산업단지에 집중될 경우 송전망 혼잡과 계통 부담이 심화될 가능성이 있지만, AI를 활용한 전력망 운영 혁신과 대규모 우량 고객 확보라는 새로운 기회도 함께 열린다는 것이 한전의 판단이다.
한전은 설문에서도 전력수요 급증과 계통 리스크를 위협 요소로 제시하면서도 AI 기반 지능형 전력망 구축과 데이터 활용을 핵심 성장동력으로 꼽았다. 앞으로는 단순히 전기를 공급하는 수준을 넘어 AI를 활용해 수요와 공급을 실시간으로 관리하는 역량이 전력회사의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는 의미다.
발전공기업 재편…한전 역할도 달라진다
발전공기업 재편 논의도 한전이 중장기 전략을 다시 짜는 배경 가운데 하나다. 현재 전력산업은 한전이 송·배전과 판매를 맡고, 한국수력원자력과 남동·중부·서부·남부·동서발전 등 6개 발전 공기업이 발전을 담당하는 구조다. 그러나 새 정부 출범 이후 발전공기업의 기능 조정과 재편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한전의 역할 역시 다시 설정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정부는 2040년 석탄발전 전면 폐지와 에너지 대전환에 대비해 5개 발전공기업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 연구용역을 수행한 삼일회계법인은 1개사 통합이 2~3개사로 나누는 방안보다 적합하다고 평가했으며, 통합법인을 한전 자회사로 두는 방안이 유력하다.
재편이 현실화할 경우 가장 큰 변화는 계통 운영 기능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다는 점이다. 재생에너지와 분산전원이 급증하는 상황에서는 발전보다 이를 안정적으로 연결하고 조정하는 송·배전망 운영이 전력산업의 핵심 경쟁력이 될 수밖에 없다. AI 데이터센터와 첨단산업 전력수요 증가까지 감안하면 한전은 단순한 전력 판매회사가 아니라 국가 전력망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플랫폼 사업자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발전공기업 재편은 조직 통합 여부를 넘어 한전의 사업모델을 어디에 둘 것인가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전기를 판매해 수익을 내는 구조에서 벗어나 전력망 운영과 계통 서비스, 에너지 플랫폼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수익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과제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새 먹거리는 VPP·ESS…'에너지 플랫폼'으로
이 같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한전이 미래 성장사업으로 제시한 분야도 기존 전력 판매와는 거리가 있다. 가상발전소(VPP), 에너지저장장치(ESS), 차량과 전력망을 연결하는 V2G 등 에너지 플랫폼 사업이 대표적이다. VPP는 전국에 흩어진 태양광과 ESS, 전기차 등을 하나의 발전소처럼 통합 운영하는 기술이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질수록 실시간 수급 조정 능력이 중요해지는 만큼 전국 송·배전망과 전력 데이터를 보유한 한전이 가장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분야로 꼽힌다.
한전은 이와 함께 자체·공동 연구개발과 기술 구매를 통한 핵심기술 확보, 기술사업화, 인수합병(M&A), 해외사업 확대, 발전·송배전 기업이 함께 진출하는 '전력 팀 코리아'도 중장기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국내 전력 판매에 머무르지 않고 기술과 전력 인프라를 결합한 종합 에너지 기업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겠다는 구상이다.
조직도 다시 짠다…맥킨지 '7S' 진단
한전은 사업 전략뿐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조직 경쟁력도 함께 점검한다. 설문에는 맥킨지가 개발한 '7S' 진단기법을 적용해 전략과 조직문화, 핵심역량, 인재, 시스템, 조직구조 등을 글로벌 유틸리티 기업과 비교 평가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사업 포트폴리오를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실행할 조직과 인력, 의사결정 체계까지 함께 손질하겠다는 의미다.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김대리, 삼전닉스 주식 몰빵했다며?"…코스피 폭...
한전 관계자는 "에너지고속도로와 AI 시대 전력수요 증가, 전력시장 제도 변화 등 경영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 만큼 중장기 전략도 이에 맞춰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며 "전력망 중심의 미래 사업과 재무 건전성, 조직 경쟁력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세종=주상돈 기자 do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