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속도로 통과한 제주
981파크·동검은이오름·사려니 숲에서 배운 여행의 다른 속도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세요."


말은 쉬웠다. 출발선 너머로 길이 갑자기 꺾여 사라졌다. 엔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손잡이를 움켜쥔 채 오른발을 조금 들자 카트가 앞으로 밀렸다. 처음엔 천천히. 이내 몸이 등받이에 붙었다. 바람이 뺨을 때렸고, 첫 굽이를 만난 발은 방금 놓았던 브레이크를 다시 찾아 헤맸다.

액셀러레이터 없이 오직 지구의 힘에만 의존해 달리는 경험, 제주 9.81 파크에서는 통제권을 자연 법칙에 온전히 넘겨주었을 때 비로소 얻는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다. 제주 9.81 파크

액셀러레이터 없이 오직 지구의 힘에만 의존해 달리는 경험, 제주 9.81 파크에서는 통제권을 자연 법칙에 온전히 넘겨주었을 때 비로소 얻는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다. 제주 9.81 파크

AD
원본보기 아이콘

제주 9.81파크의 경주에는 액셀러레이터가 없다. 이름의 '9.81'은 지구 중력가속도 9.81m/s²에서 왔다. 무동력 차량을 타고 경사면을 내려오며 운전자는 방향과 제동만 맡는다. 나머지는 지구가 한다. 약 1.2㎞ 코스에서 카트는 중력만으로 속도를 얻고, 주행 기록과 영상은 애플리케이션(앱)에 남는다. 자연법칙 하나가 놀이와 경쟁으로 바뀐 셈이다.

빠르게 달리는 요령은 단순했다. 브레이크를 덜 밟을 것. 그러나 단순한 것과 쉬운 것은 다르다. 내리막 끝에 급커브가 나타날 때마다 몸은 이론보다 먼저 반응했다. 밟지 말라는 머리와 살아야 한다는 오른발이 싸웠다. 앞선 카트가 굽이 너머로 사라지면 잠깐 용감해졌고, 속도가 붙으면 다시 소심해졌다. 입에서는 웃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나왔다.


결승선을 지나자 카트는 스스로 속도를 늦췄다. 잠시 뒤 자동주행으로 오르막을 거슬러 올라갔다. 내려갈 때는 제주 바다를 향해 몸을 던졌고, 돌아오는 길에는 한라산을 마주했다. 조금 전까지 바람과 커브였던 순간은 휴대전화 속 몇 분 몇 초가 됐다. 여행지에서 사람들은 대개 풍경을 저장한다. 이곳에서는 속도를 저장했다.

제주에서 중력은 익숙한 힘이다. 현무암을 만들고, 오름의 경사를 만들고, 비가 낮은 곳으로 흐르게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던 중력이 탑승권을 끊고 기록을 다투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산은 오르라고 있는 줄 알았다. 9.81파크에서 산은 잘 내려가기 위해 존재했다.


달리기를 마친 뒤 동쪽으로 차를 돌렸다. 다음 목적지는 동검은이오름이었다. 조금 전까지 중력은 속도를 선물했다. 이번에는 한 걸음마다 발목을 잡았다.


검은 흙과 붉은 화산송이가 섞인 길 위로 풀이 허리까지 자라 있었다. 입구에서 부드러워 보이던 능선은 가까워질수록 가팔라졌다. 몇 걸음 오르고 숨을 쉬었다. 다시 몇 걸음 오르고 뒤를 돌아봤다. 처음에는 풍경을 보려고 멈췄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차서 풍경을 보는 척했다.

동검은이오름은 정상보다 오르는 몸을 먼저 기억하게 한다. 완만해 보이는 능선도 가까이 갈수록 숨을 요구하고, 뒤돌아선 순간 비로소 제주 동부 오름군락이 시야에 들어온다. 제주도

동검은이오름은 정상보다 오르는 몸을 먼저 기억하게 한다. 완만해 보이는 능선도 가까이 갈수록 숨을 요구하고, 뒤돌아선 순간 비로소 제주 동부 오름군락이 시야에 들어온다. 제주도

원본보기 아이콘

앞에는 오름 사진가 최경진씨가 섰다. 그는 빨리 걷지 않았다. 오름을 많이 오른 사람은 거침없이 정상을 향할 것 같았지만, 자주 멈췄다. 풀 사이로 난 길, 능선이 열리는 지점, 구름이 햇빛을 가리는 순간을 기다렸다. 관광객에게 오름은 정상으로 가는 길이지만, 사진가에게는 빛이 오는 길이었다.


동검은이오름은 이름부터 어둡다. 그러나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시야는 밝아졌다. 능선 위에 서자 오름들이 한꺼번에 몸을 일으켰다. 다랑쉬오름은 멀리서도 단정한 원뿔을 세웠고, 아끈다랑쉬는 그 곁에 몸을 낮췄다. 용눈이오름은 길게 누웠고, 높은오름과 백약이오름은 앞뒤로 겹쳤다. 바다 쪽으로는 성산일출봉이 문진처럼 놓였다.


제주의 오름은 하나씩 떼어 볼 때보다 함께 볼 때 더 제주다웠다. 어느 하나가 풍경을 독차지하지 않았다. 높은 것은 낮은 것 덕분에 높아 보였고, 둥근 것은 가파른 능선 옆에서 더 부드러워졌다. 산맥처럼 장엄하지 않고, 설산처럼 비현실적이지도 않았다. 마을과 밭 사이에 오름이 있었고, 오름 사이에 다시 도로와 묘지와 목장이 있었다.


능선을 따라 조금 더 걷자 출입을 막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훼손된 구간을 복원하기 위한 통제였다. 사람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곳일수록 사람의 발을 막아야 회복되는 역설. 사진가는 표지판 앞에서도 카메라를 들었다. 금지라는 문구를 피해 절경만 담지 않았다. 지금의 오름이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움을 위협하는 사람의 흔적 또한 오름의 현재였다.


올라올 때에는 경사만 보였다. 내려갈 때에는 길 양쪽의 풀과 작은 꽃, 멀리 있는 오름들이 보였다. 같은 길이었지만 몸의 방향이 달라지자 풍경의 크기도 달라졌다. 9.81파크에서는 내려가는 것이 절정이었지만, 동검은이오름에서는 내려가는 길이 복기였다.


여행 마지막 이동은 사려니 숲, 외에서 시작됐다. 말 가까이에 서자 생각보다 컸다. 등은 눈높이보다 높았고, 콧김은 따뜻했다. 사진 속에서는 얌전해 보였던 말이 실제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안장과 등자, 고삐가 함께 흔들렸다. 왼발을 등자에 걸고 몸을 끌어올리는 순간, 땅이 한층 낮아졌다.

제주 외승 체험. 말의 귀가 먼저 길을 향하고, 사람의 시선은 그 뒤를 따른다. 숲길에서는 풍경보다 속도를 내주는 존재가 먼저 달라진다. 사려니외승

제주 외승 체험. 말의 귀가 먼저 길을 향하고, 사람의 시선은 그 뒤를 따른다. 숲길에서는 풍경보다 속도를 내주는 존재가 먼저 달라진다. 사려니외승

원본보기 아이콘

말 위에서는 자세부터 어색해졌다. 등을 곧게 펴면 너무 뻣뻣했고, 힘을 빼면 떨어질 것 같았다. 무릎에 힘을 주자 다리가 금세 굳었다. 교관은 고삐를 세게 당기지 말고 몸의 중심을 맞추라고 했다. 출발하자 말은 사람의 지시보다 앞말의 엉덩이를 따라 걸었다. 한 마리가 움직이면 다음 말이 움직였다. 초보 승객이 고삐를 쥐고 있었지만, 길의 질서는 말들이 알고 있었다.


"가자." 말에게 말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발뒤꿈치로 옆구리를 가볍게 눌렀다. 그제야 한 걸음 움직였다. 9.81파크에서는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면 지구가 알아서 달려줬다. 말 위에서는 사람의 뜻보다 말의 기분과 앞말의 움직임이 중요했다. 운전대를 쥔 것은 나였지만 결정권까지 가진 것은 아니었다.


숲으로 들어가자 볕이 잘게 부서졌다. 삼나무와 편백이 길 양옆으로 기둥처럼 늘어섰다. 발굽이 흙을 누를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말이 오르막을 오를 때에는 몸이 뒤로 밀렸고, 내리막에서는 앞으로 쏠렸다. 경사에 맞춰 상체를 기울이는 동안 풍경을 볼 틈이 없었다. 평지에 들어서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말의 귀가 먼저 길을 향했고, 그다음 시선이 따라갔다. 풀잎 하나가 흔들려도 말의 귀가 움직였다. 사람에게 조용한 숲은 말에게 수많은 신호가 오가는 장소였다.


앞서가던 말이 갑자기 멈췄다. 뒤따르던 말도 줄줄이 섰다.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는 줄 알았는데, 길가 풀을 뜯으려는 모양이었다. 고삐를 당기자 고개를 잠깐 들더니 다시 풀 쪽으로 돌아갔다. 여행자는 일정에 쫓겼고 말은 점심에 충실했다. 그 짧은 실랑이가 좋았다. 9.81파크에서 기록은 0.001초까지 나뉘었고, 오름에서는 정상까지 걸린 시간을 가늠했다. 숲에서만큼은 말 한 마리가 풀을 씹는 동안 모두가 멈춰야 했다. 사람은 속도를 결정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루 동안 세 번 제주를 이동했다. 처음에는 브레이크를 덜 밟아야 빨랐다. 다음에는 숨이 차면 걸음을 늦춰야 했다. 마지막에는 사람이 서두른다고 말까지 서두르지 않았다.


흔히 제주 여행에서 묻는 것은 어디를 봤느냐다. 그날의 질문은 조금 달랐다. 무엇을 타고, 어떤 속도로, 누구에게 몸을 맡겼는가. 카트가 급커브를 돌 때에는 풍경을 볼 수 없었다. 오름을 오를 때에는 숨이 차 말을 줄였다. 말 위에서는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온몸에 힘을 줬다. 아름답다는 감탄은 늘 한 박자 늦게 왔다.

AD

먼저 달리고, 다음에 숨찼고, 마지막에 흔들렸다. 돌아온 뒤에야 비로소 제주가 보였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