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틀면 극우로 몰리는 유럽…심각해진 냉방 정치[시사쇼]
유럽 극우정당들의 '에어컨 공약' 확산
우크라戰 이후 복합위기 대비 못한 유럽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
■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미리 PD
■ 출연 : 이현우 기자
올여름 유럽 대륙이 기록적인 폭염으로 신음하고 있다. 섭씨 40도를 웃도는 무더위가 한 달 넘게 이어지면서 유럽 전역에서 발생한 온열질환 사망자 수가 이미 1만명을 돌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며 비상사태가 선포될 법한 상황이지만, 정작 유럽 정치권은 엉뚱하게도 '에어컨 설치' 문제를 두고 극심한 이념 대립을 벌이고 있다. 에어컨 가동 여부가 정치적 성향을 가르는 잣대가 되면서, 에어컨을 틀자고 주장하면 '극우'로 몰리는 기이한 냉방 정치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에어컨 보급 주장하면 극우…정계 핵심의제 떠오른 냉방문제
아시아나 한국처럼 에어컨 보급률이 높은 국가의 시각에서는 이러한 논쟁 자체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목숨을 위협하는 폭염 속에서 에어컨을 켜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대처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유럽의 소셜미디어(SNS)상에서는 에어컨을 켜는 행위나 에어컨 보급을 주장하는 이들을 향해 극우주의자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과 에어컨 이미지를 합성한 조롱 섞인 게시물까지 유포되는 실정이다.
이처럼 냉방 기기 사용이 정치 쟁점화된 배경에는 유럽 각국의 선거를 앞둔 극우 정당들의 공약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의 국민연합(RN, 옛 국민전선)과 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AfD)' 등 유럽 전역의 대표적인 극우 정당들은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에서 '모든 가정에 에어컨 보급 및 설치 지원'을 핵심 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폭염으로 고통받는 서민들의 표심을 공략하기 위해 가장 직관적이고 현실적인 대책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대해 사회주의 계열 정당들과 친환경 시민단체들은 즉각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모든 가정에 에어컨을 설치할 경우 전력 사용량이 급증해 전력망이 마비될 뿐만 아니라, 에어컨 냉매 가스 배출로 인해 지구온난화가 더 심해지는 악순환에 빠질 것이라 경고한다. 이들이 제시하는 폭염 극복 방안은 에어컨 설치가 아닌 친환경 정책이다. 도시에 나무를 대대적으로 심어 열섬 현상을 완화하고, 가정 내에서는 조명을 끄거나 햇빛을 차단할 두꺼운 암막 커튼을 달아 자연적으로 더위를 버텨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환경적 관점에서는 타당한 지적일 수 있으나, 당장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일반 시민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매일같이 온열질환 사망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에어컨 설치를 막는 것은 사실상 방조죄나 다름없다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특히 유럽의 많은 구도심 지역에서는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나 오래된 건물의 배선 노후화로 인한 화재 위험 등을 이유로 지자체 차원에서 에어컨 설치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에어컨 설치 규제가 가장 까다로운 프랑스의 경우, 에어컨 기기 자체는 약 200만원이면 구매할 수 있지만 정부 승인을 받고 배관 및 설치 공사를 마치는 데 드는 총비용이 무려 1000만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도한 비용과 까다로운 규제에 지친 시민들은 점차 이념적 낙인에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극우로 몰리든 상관없이 당장의 생존을 위해 에어컨 설치를 약속하는 정당에 표를 던지겠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차기 선거에서 극우 정당들이 대대적인 약진을 거둘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친환경 에너지정책 실패 주장하는 유럽 극우
유럽 극우 정당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현 냉방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 지난 정부들의 무분별한 친환경 에너지 정책에 있다고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들은 정부가 에어컨 설치를 반대하는 속사정이 결국 '전력 부족'에 있으며, 이 전력난은 과거 좌파 정부들이 대안 없이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는 '탈원전' 정책을 밀어붙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프랑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기존 원전들의 가동을 순차적으로 중단했다. 대신 태양광과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대폭 늘려 현재 유럽연합(EU) 전체의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30%를 넘어섰다. 극우 세력은 기후에 의존하는 불안정한 재생에너지 위주의 정책이 안정적인 전력 수급을 가로막아 국민들이 에어컨조차 마음대로 켜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반면 좌파 및 녹색 정당들은 이러한 주장에 선을 긋고 있다. 친환경 재생에너지 확대로 전체 전력 생산량 자체는 오히려 늘어났으며, 현재의 전력 위기는 전력량 부족이 아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론으로 인한 전반적인 에너지 수입 비용 상승과 전기요금 폭등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양측의 주장이 모두 아전인수 격으로 왜곡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유럽이 재생에너지를 늘려 전력 생산을 다변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태양광과 풍력은 날씨의 영향을 극도로 많이 받는다.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불지 않으면 발전량이 급감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많은 유럽 국가들은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을 보완하기 위해 천연가스를 이용한 화력발전을 차선책으로 활용해 왔다.
천연가스는 석탄에 비해 온실가스 배출량이 적어 친환경 전환기 가교 역할로 적합했으나, 문제는 유럽이 사용하는 천연가스의 대부분을 러시아산 수입에 의존해 왔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대러시아 제재로 가스 공급관이 막히자 유럽의 에너지 수급 설계는 통째로 붕괴했다. 독일 등지에서 활동하는 극우 정당들은 가동을 멈춘 원전 수십 기를 즉각 재가동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현 정부는 노후 원전을 다시 안전하게 가동하는 데 드는 수백억원의 비용과 시간을 감안할 때 차라리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는 것이 경제적이라며 맞서고 있다. 정파 간의 주도권 싸움 속에 실질적인 수급 대책은 표류하고 있는 모양새다.
복합적 위기 대비 못한 유럽…갑자기 시작된 에너지난
유럽이 이처럼 전력난에 취약해진 구조적 원인을 살펴보면 한때 누렸던 지나치게 값싼 에너지 환경의 역설을 마주하게 된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까지 유럽은 지리적으로 연결된 송유관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매우 저렴하게 석유와 천연가스를 들여왔다.
배럴당 생산 단가가 18달러에서 20달러 선인 러시아산 원유에 최소한의 이윤만 붙여 수입했기 때문에 별도의 운송비가 들지 않았다. 반면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지역의 원유는 생산 단가가 8달러 수준으로 더 낮아도, 유조선을 통한 해상 운송비가 추가되어 유럽에 도착할 때는 배럴당 50달러가 넘었다. 이 때문에 유럽 국가들은 중동산 원유 수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국제 유가 흐름에 따라 배럴당 60~70달러 이상을 지불하며 에너지를 수입해 올 때, 유럽은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에너지를 조달하며 남는 재원을 국가 복지 예산으로 활용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겹치고 미국과의 관계가 변화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뒤집혔다. 싼값에 의존하던 러시아산 가스는 완전히 차단되었고, 중동 호르무즈 해협마저 긴장이 고조되어 선박 통행이 어려워지자 유럽은 기존보다 4배 이상 비싼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와 원유를 수입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더욱이 바다와 접하지 않은 내륙국가가 많은 동유럽 지역은 미국산 연료 수송선이 접안할 시설조차 없어 러시아 의존도를 낮추기 더욱 어려운 실정이다. 과거 안정적인 에너지 안보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저렴한 러시아산 자원과 성급한 탈원전에만 기댔던 대가를 폭염 속에서 가혹하게 치르고 있는 셈이다.
메가프로젝트 준비 중인 한국…유럽 냉방난 반면교사 삼아야
유럽의 이 같은 냉방 정치와 전력 위기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한국은 전력 공급을 국가가 공기업인 한국전력공사를 통해 통합 관리하고 있어 민간 전력 사업자들이 난립해 요금이 폭등하는 유럽과는 상황이 다르며, 비교적 안정적인 에너지 수급 계획을 갖춘 국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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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 역시 미래의 대규모 전력 수요 폭발에 대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최근 정부가 비수도권 지역을 중심으로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구축과 첨단 대형 공장, 대규모 데이터 센터 유치를 발표하면서 전력 확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히 인공지능(AI) 산업의 고도화는 상상을 초월하는 전력을 요구한다. 생성형 AI 기술이 발전하고 향후 서비스와 로봇 상용화가 본격화되면 데이터 센터의 전력 소모량은 현재보다 수십 배에서 최대 수백 배까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기후변화로 인한 여름철 극한 폭염이 해마다 갱신되며 일반 가정과 상업 시설의 냉방 수요 역시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미래 산업 발전과 기후 위기 대응이라는 두 가지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교하고 장기적인 전력 수급 대책 수립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럽의 냉방 정치 갈등을 타산지석 삼아 에너지 안보와 수급 대비책을 서둘러 정비하지 않는다면,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 역시 에어컨 가동 여부를 두고 극단적인 사회적 분열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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