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에겐 비밀 부끄러워 모임도 안가"
하루 2만보 땀 흘려도 시급 5000원 하회
"65세 혜택 뺏기 전 소득체계 개혁 필요"

"휴대폰이 꺼지면 의뢰인과 연락도 못 하고 지도까지 못 보니까, 이걸 항상 챙겨 다녀요."


지난 2일 오전 8시께 합정역 방면 지하철 2호선 객차 안. 백발의 김모씨(72)가 손때 가득한 대용량 보조배터리를 들어 보였다. 그는 서울 전역을 오가며 두 발로 물건을 나르는 1년차 '실버 택배원'이다. 이날의 첫 임무는 은평구 증산역(6호선) 인근에서 강서구 화곡역(5호선)까지 서류를 나르는 일. 개찰구를 지나는 김씨의 두 뺨을 타고 벌써부터 비지땀이 흘렀다.

지난 2일 오전 8시께 서울 중구 지하철 2호선 을지로4가역에서 노인 택배업체 배달원 김모씨(72)가 지하철 6호선 증산역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이지예 기자

지난 2일 오전 8시께 서울 중구 지하철 2호선 을지로4가역에서 노인 택배업체 배달원 김모씨(72)가 지하철 6호선 증산역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이지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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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승 통로에 들어서자 김씨는 망설임 없이 역사를 뚫고 나갔다. 흡사 '인간 내비게이션'처럼 길을 훤히 꿰고 있었다. 실버 택배 기사들은 하루 평균 2만보 이상을 걷는다. 무거운 물건은 안전상 취급하지 않지만, 지하철 계단과 긴 환승 통로를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체력 소모가 크다.


김씨는 "물건이 젖을까 봐 마음 졸여야 하는 장마철이 가장 어렵다"며 수건으로 목덜미를 훔쳤다. 이미 등판이 흠뻑 젖은 그에게 거듭 빈 자리를 권한 뒤에야 "눈치가 보여서"라며 조심스레 앉았다. 내릴 역을 놓칠까 수시로 경로를 확인하고 알람까지 맞춰가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날 김씨가 서류 한 장을 배달하기 위해 이동한 거리는 33㎞. 환승 시간을 뺀 지하철 이동 시간만 꼬박 125분이었다. 건당 배송비 1만3000원에서 수수료 30%를 떼면 9100원이 손에 들어온다. 수도권 전철망을 종횡무진 누비며 땀을 흘려도 노년의 몸값은 시간당 4400원꼴이다. 올해 최저시급 1만320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다. 김씨는 "하루 반나절 동안 일해 버는 돈이 3만원도 채 안 되지만 두 다리로 움직여 밥벌이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라며 덤덤히 웃었다.

"하루 2만보 뛰어야 고작"…지하철 틈새 백발 택배원의 고군분투 원본보기 아이콘

백발의 노인들이 은퇴 이후에도 '제2의 일자리'를 찾아 생존 전선에 뛰어들고 있다. 노인 취업자 400만명 시대가 열렸지만, 그 이면에는 초단기·저임금 일자리로 밀려난 노년의 노동이 있다. 단기 처방에 그치는 일자리 정책을 넘어 종합적인 노후 보장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6일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취업자는 2023년 352만5000명에서 2024년 380만6000명, 지난해 414만7000명으로 빠르게 증가했다. 특히 70세 이상 취업자는 지난해 216만2000명으로, 관련 통계를 별도 집계하기 시작한 2018년 이후 처음으로 200만명 선을 돌파했다. 전체 노인 취업자 가운데 70세 이상 고령자의 비율은 지난해 기준 52.1%다. 이는 노년층의 경제활동 증가가 단순히 은퇴 시기를 늦추는 차원을 넘어 생계형 노동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시사한다.


"하루 2만보 뛰어야 고작"…지하철 틈새 백발 택배원의 고군분투 원본보기 아이콘

노인 취업자 수의 증가를 양질의 노인 일자리가 많아졌다는 의미로 해석하긴 어렵다. 노후소득이 충분하지 않아 경제활동을 이어가는 고령층이 늘고 있지만, 상당수는 지하철 택배와 같은 초단기·저임금 일자리에 머무는 것이 현실이다. 올해 65세 이상 노인 단독가구 기준 기초연금 월 최대 수급액은 34만9700원이다. 연금과 일을 합쳐도 생계를 꾸리기 빠듯한 구조다.


은퇴 전 유통회사와 인테리어 업계에서 일했다던 김씨는 한참을 망설이다 "이 일을 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동창회나 친구 모임에도 잘 나가지 않는다"며 "다른 일을 하고 싶어도 칠십 넘은 노인을 써주는 곳은 거의 없다"고 털어놨다. 지하철에서 만난 또 다른 실버 택배원 박광웅씨(86)는 "몸이 아프지만 택배라도 나르며 버틴다"며 "연금만으로는 생활이 안 된다"고 했다.


배송비는 서울 시내 기준 건당 1만3000원, 경기 지역으로 넘어가면 1만8000~2만원, 천안 왕복 배송은 3만원 수준이다. 수수료 30%를 떼면 수중에 남는 돈은 7000~2만원대에 그친다.


최근 서울시가 지하철 무임승차 연령을 현행 65세에서 70세로 상향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실버 택배원들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배송 수수료가 주 수입원인 이들에게 교통비 부담은 곧 적자로 이어진다. 4년차 실버 택배원 최모씨(75)는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없으면 애초에 이 일을 할 수 없다"며 "우리 사무실만 해도 70세 미만이 30~40% 정도"라고 토로했다.


지난 2일 오전 8시께 지하철 2호선 안에서 실버 택배원 김모씨(72)가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고 있다. 이지예 기자

지난 2일 오전 8시께 지하철 2호선 안에서 실버 택배원 김모씨(72)가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고 있다. 이지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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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는 고령층의 노동 문제를 단순한 고용 정책으로 해결할 게 아니라 국민연금을 비롯한 노후소득 보장체계를 개편하는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생계를 위해 은퇴 이후에도 계속 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근본적인 원인은 부족한 노후소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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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수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은 우리나라 현실을 고려하면 노인 연령 기준을 상향하더라도 저소득층 등 취약계층에는 기존 수준의 교통복지 혜택을 유지하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이어 "외국은 연금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해 은퇴 후 일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나라는 생계가 어려워 계속 일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근본적으로는 '더 내고 더 받는' 국민연금을 비롯해 노후소득 보장체계를 강화해 노인들이 생계를 위해 무리하게 일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지예 기자 eas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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