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제조업 판도 바뀌는 변곡점"
"5~10년 국가 로드맵 필요"
"제조기업 지원 넘어 데이터·공급 생태계 함께 키워야"
지난 6월 11일 경북 포항 한국로봇융합연구원(KIRO). 방열복을 입은 로봇이 용선 측온 장비를 조작하며 제철소 고위험 작업을 재현하고 있다. 포스코와 연구진은 휴머노이드 기반 작업 로봇을 활용해 제철소 위험 공정의 무인화를 추진하고 있다. 사진=강나훔 기자
산업의 심장'으로 불렸던 한국 제조업이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저출산·고령화로 생산현장을 지탱할 인력은 줄고, 중국은 더 이상 값싼 노동력만을 앞세운 '추격자'가 아니다. 전기차와 배터리, 철강, 조선, 로봇 등 한국의 주력 산업 곳곳에서 기술 격차를 좁히거나 일부 분야에서는 앞서가기 시작했다. 제조강국인 독일과 일본도 인공지능(AI)을 접목한 제조혁신에 다시 속도를 내고 있다. 여기에 미국은 AI 플랫폼과 반도체를 앞세워 글로벌 AI 생태계를 주도하고 있다.
한국 제조업이 지금의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과거와 같은 방식만으로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값싼 노동력으로도, 거대한 내수시장으로도 승부하기 어려운 한국이 꺼낼 수 있는 카드는 제조업과 AI의 결합이다. 정부가 제조업 AI 전환 전략인 'M.AX(Manufacturing AI Transformation)'를 국가 산업전략으로 내세운 배경도 여기에 있다.
전문가들은 M.AX의 방향성에는 공감하면서도 단기 사업을 늘리는 방식만으로는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제조업과 AI를 연결하는 5년, 10년 단위의 국가 로드맵을 만들고 데이터와 솔루션, 운영·유지관리까지 아우르는 산업 생태계를 함께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골든타임 넘어선 변곡점"
윤병동 서울대학교 기계공학부 교수 겸 원프레딕트 대표는 14일 아시아경제와의 통화에서 "AI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라며 "제조업에서는 숙련 전문가들의 대규모 은퇴가 시작됐고 국방 분야는 병력 부족 문제를 겪고 있다. 제조 AI는 단순한 자동화를 넘어 산업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우리 제조업은 오랜 기간 축적한 제조 노하우와 암묵지(暗默知)가 강점"이라며 "이를 AI와 결합해 대전환을 이루자는 M.AX의 방향에는 충분히 공감한다"고 평가했다.
이상현 산업연구원 AI디지털전환연구실장도 "범용 AI는 글로벌 빅테크가 생태계를 주도하고 있어 우리가 같은 방식으로 경쟁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반면 제조 AX는 산업별 경험과 지식이 핵심인 만큼 한국 제조업의 강점을 활용할 수 있는 전략"이라고 했다.
특히 전문가들은 지금을 단순히 투자하기 좋은 '골든타임'보다 제조업의 순위가 뒤바뀔 수 있는 '변곡점'으로 진단했다.
윤 교수는 "지금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1등이 3등이 되고, 3등이 1등이 될 수도 있는 시기"라며 "AI는 더 잘되기 위한 전략이라기보다 제조업이 살아남을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생존의 문제"라고 말했다.
한국이 제조 AI를 계기로 독일과 일본을 넘어설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 그는 "최근 세계제조포럼에서 독일 지멘스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한국의 제조 AI 전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벤치마킹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며 "독일과 일본은 제조 경쟁력은 뛰어나지만 디지털전환(DX)이 충분히 진행되지 않아 제조 AI 전환에도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실장은 글로벌 빅테크의 제조업 진입을 직접적인 위협으로 꼽았다. 그는 "빅테크들은 범용 AI에서 제조 현장까지 풀스택 형태로 들어오고 있다"며 "한국이 제조 현장의 강점을 제때 AI 생태계로 연결하지 못하면 글로벌 기업이 만든 체계에 종속되는 '락인(Lock-in)' 상황에 놓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제조기업만 지원해선 한계…"AI판 소부장 사태 막아야"
전문가들은 제조기업의 AI 도입만 지원해서는 M.AX가 지속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AI 모델을 산업별로 특화하고 데이터를 만들고 해석하며, 도입 이후 시스템을 운영·유지할 공급기업까지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실장은 과거 일본 수출규제 당시 드러난 소재·부품·장비 의존 문제를 언급하며 "완성품 경쟁력이 아무리 높아도 공급망의 핵심 부문이 약하면 산업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며 "AI에서도 생태계 차원의 준비가 없다면 또 다른 소부장 사태를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AI는 산업별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기술"이라며 "실제 데이터가 부족하면 합성데이터를 만들고 시뮬레이션을 통해 학습시키는 '데이터 팩토리' 같은 새로운 공급기업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범용 AI를 만드는 경쟁보다 이를 제조업에 맞게 특화하고 데이터를 구축·운영하는 공급 생태계를 키우는 것이 한국이 강점을 가질 수 있는 영역"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이 7대 첨단산업의 AI 미도입 기업 960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제조기업들이 AI 도입 과정에서 꼽은 가장 큰 장애요인은 초기 투자비 부담(49.0%)이었다. AI 전문인력 부족은 37.7%, 유지·운영 비용 부담은 32.2%였다. 단순히 솔루션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에 맞게 AI를 적용하고 운영할 전문기업과 인력이 함께 필요하다는 의미다.
중견·중소기업으로 기술이 확산될 수 있는 사다리도 필요하다. 윤 교수는 "대기업은 자금과 인력으로 자체 대응할 수 있지만 중견·중소기업은 독자적으로 추진하기 쉽지 않다"며 "대기업에서 활용된 기술이 중견·중소기업으로 내려가면서 가격이 낮아지고 일반화되는 구조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격차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조사에서도 AI 미도입 기업 가운데 향후 도입 계획이 있다는 비중은 중소기업이 17.0%였지만 중견기업은 32.1%, 대기업은 40.0%였다. 종사자 수 기준으로도 10~50인 미만 기업은 14.9%에 그친 반면 300인 이상 기업은 27.4%였다.
"6개월짜리 단기 사업으론 안 된다"…5년·10년 로드맵 필요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은 장기 로드맵이었다. 그때그때 등장하는 기술이나 조언에 따라 사업을 추가할 것이 아니라 한국 제조업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먼저 정하고 연도별 투자와 과제를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M.AX는 6개월이나 1년 단위 사업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 5년, 10년을 내다봐야 하는 국가 전략"이라며 "장기 로드맵을 수립한 뒤 지금 어디에 투자하고, 내년에는 무엇을 하며, 3년 뒤와 5년 뒤 어떤 목표를 달성할지를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로드맵은 미래를 정확히 맞히기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다. 국제 정세와 기술이 바뀌면 수정하면 된다"며 "중요한 것은 장기 목표와 중기 목표 아래 지금의 사업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이 실장도 독일의 인더스트리 4.0을 사례로 들었다. 그는 "독일은 오랜 기간 준비한 시나리오를 공개하고 기술 발전에 맞춰 하나씩 현실화해 왔다"며 "한국도 해외 동향을 뒤쫓기보다 우리 제조업의 구조적 특성과 강점을 반영한 장기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조 AI 정책이 부처별로 나뉘어 추진되는 점도 보완 과제로 꼽았다. 그는 "중소벤처기업부의 스마트공장 정책과 산업통상부의 M.AX 정책을 연결하는 브리지가 필요하다"며 "스마트공장을 고도화하는 과정에서 기업들이 AI를 직접 경험하고 투자 효과를 확인할 수 있어야 제조 AI 확산도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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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의 성패는 새로운 AI 기술을 얼마나 많이 개발했는지보다 제조업의 강점을 AI와 연결하는 전략을 얼마나 일관되게 추진했는지에 따라 갈릴 가능성이 크다. 한국 제조업의 다음 10년을 좌우할 것은 AI라는 기술 자체만이 아니라, 이를 생산성과 산업 경쟁력으로 바꿔낼 흔들림 없는 국가 로드맵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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