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은 서울시, 해외 출판은 유족 재단…둘로 갈라진 천경자 유산
市 "비매품 허가 뒤 1000부 판매"…재단 "수익 없는 공익사업"
워홀·피카소는 권리 창구 일원화…한국은 책 나온 뒤 사용료 충돌

9년 전 "저작권을 행사하지 않을 거라면 돌려달라"고 했던 고(故) 천경자 화백 유족에게 서울시가 이번에는 1210만원짜리 청구서를 보냈다. 천 화백 작품 160여 점을 담아 세계 시장에 내놓은 한·영 도록의 저작권료다.


천경자 화백의 1978년작 '탱고가 흐르는 영혼'을 관람객이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천경자 화백의 1978년작 '탱고가 흐르는 영혼'을 관람객이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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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미술계에 따르면 서울시는 최근 유족 측 천경자재단이 이탈리아 미술 출판사 스키라와 제작한 도록 '천경자: 찬란한 전설'에 저작권 사용료 1210만원을 부과했다. 재단은 "한국 작가를 세계에 알리기 위한 공익 출판"이라며 반발했고, 서울시는 "민간 출판사가 유상 판매하는 물량에만 규정에 따라 사용료를 매겼다"고 맞섰다.

도록은 천 화백의 작품과 드로잉, 글과 기록사진을 담은 작가 모노그래프다. 스키라 공식 판매가는 59유로다. 재단 측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해외 출판 지원사업에 선정돼 5000만원을 지원받았으며, 도록 상당수를 해외 미술관과 도서관 등에 무상 배포했다고 밝혔다. 재단이 판매수익을 직접 받는 구조도 아니라고 했다.

아마존에서 사전 주문 판매 중인 천경자 도록. 아마존 홈페이지

아마존에서 사전 주문 판매 중인 천경자 도록. 아마존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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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비매품 신청"…재단 "판매는 세계화 수단"

서울시는 재단이 지난해 9월 도록 2000부를 '비영리 목적의 비매품'으로 신청해 무상 사용 허가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후 시가 파악한 스키라 계약 내용에는 1000부가 출판사 판매용, 나머지 1000부가 재단 사용분으로 구분돼 있었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재단 배포분에는 무상 허가를 유지하고 판매용 물량에만 사용료를 부과했다고 설명했다.


1210만원은 판매액이나 이익에 연동한 로열티가 아니다. 서울시는 본문에 실린 작품 160점에 점당 7만5000원, 표지 작품 한 점에 10만원을 적용했다고 밝혔다. 책이 몇 권 팔렸는지와 관계없이 수록 작품 수를 기준으로 계산한 것이다.

서울시는 재단이 저작권 사용 허가를 받기 전인 2024년 7월 스키라와 제작·유통 계약을 맺었다고도 밝혔다. 도록에는 서울시를 저작권자로 표시하는 대신 모든 내용과 이미지의 권리가 재단에 있다는 취지의 문구가 실렸으며, 지난 3월 수정을 명령했다는 것이 시의 설명이다. 재단은 서울시의 사용료 부과가 부당하다며 한국저작권위원회 분쟁조정 절차를 밟을 방침이다.


공익사업이라는 재단의 설명과 저작권 정리는 별개의 문제다. 국제 출판에서 작품 이미지의 이용허락을 출간 전에 확보하는 '저작권 클리어런스'는 기본 절차다. 재단은 서울시가 저작권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제 재단 홈페이지도 천경자 작품 이미지의 저작권이 서울시에 있다고 안내해왔다. 판매용 도록을 세계적 출판사와 제작하면서 허가 범위와 판권면 표기를 사전에 매듭짓지 못했다면, 세계화라는 명분만으로 넘기기 어려운 실무상 부실이다.


27일 오후 2시 서울 서소문동 서울시립미술관 지하 1층 세미나실에서 고 천경자 화백의 장남 이남훈씨, 차녀 김정희씨, 김씨의 남편 문범강씨, 고인이 된 차남 김종우씨의 미망인 서재란씨(왼쪽부터)가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27일 오후 2시 서울 서소문동 서울시립미술관 지하 1층 세미나실에서 고 천경자 화백의 장남 이남훈씨, 차녀 김정희씨, 김씨의 남편 문범강씨, 고인이 된 차남 김종우씨의 미망인 서재란씨(왼쪽부터)가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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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엔 "권리 행사 안 하면 반환하라"

갈등은 이번 도록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천 화백은 1998년 작품을 기증하면서 자신이 제작한 미술작품의 저작권을 서울시에 양도했다. 서울시는 2014년 기증 작품의 저작권 등록을 추진하며 "과도한 상업적 이용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당시에는 공공기관이 보유한 저작물을 시민과 공유하자는 취지에 역행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2017년 '미인도' 전시 논란이 불거지자 유족은 서울시에 공개 질의서를 보냈다. 서울시가 저작재산권자로서 작가의 뜻을 지킬 의사가 없다면 권리를 유족에게 돌려달라는 요구였다. 서울시는 "저작재산권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며 거부했다.


그 뒤에도 법적 저작권은 서울시에, 작가 연구와 기념사업·해외 출판은 유족 재단에 남았다. 저작권을 행사하는 곳과 '천경자'라는 작가의 유산을 움직이는 곳이 서로 달랐다. 이번 도록은 그 이중 구조가 국제 유통 단계에서 충돌한 사례다.

해외 주요 작가재단과 미술관은 원작 저작권과 이미지 이용 조건을 구분해 관리한다. 피카소·앤디 워홀은 출판과 상업 이용에 사전 허가가 필요하고, 퍼블릭 도메인인 뭉크·반 고흐·마티스도 미술관 제공 이미지에는 별도 이용 조건이 적용된다.

해외 주요 작가재단과 미술관은 원작 저작권과 이미지 이용 조건을 구분해 관리한다. 피카소·앤디 워홀은 출판과 상업 이용에 사전 허가가 필요하고, 퍼블릭 도메인인 뭉크·반 고흐·마티스도 미술관 제공 이미지에는 별도 이용 조건이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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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는 책 만들기 전 '허가 창구'부터 정한다

앤디 워홀 재단은 워홀 생전 작품의 저작권과 이름·서명에 관한 상표를 관리한다. 책·잡지·영화·웹사이트에서 작품을 사용하려면 미국은 ARS, 영국은 DACS, 프랑스는 ADAGP를 통해 허가받도록 창구를 공개해 놓았다. 상업적 라이선스 수입은 재단 기금에 편입돼 예술가와 비영리 예술단체 지원에 쓰인다. 권리 행사와 작가 연구·확산, 수익의 공익 환원이 한 조직 안에서 연결돼 있다.


피카소 작품은 상업용과 비상업용을 가리지 않고 피카소 관리국의 사전 서면 승인을 받아야 한다. 관리국은 상속인을 대표해 사용 허가와 계약, 교정쇄 확인, 청구까지 맡는다. 작품을 실을 때는 '? Succession Picasso'라는 저작권 표시도 요구한다. 원화를 보유한 미술관과 작품을 복제할 권리를 가진 주체를 명확히 나눈 구조다.


반 고흐는 저작권 보호기간이 끝난 작가다. 그런데도 반 고흐 미술관은 원작 저작권과 미술관이 제공하는 디지털 이미지의 이용 조건을 구분한다. 연구·개인 학습·비영리 출판에는 이미지를 무료로 제공하지만, 상업·기업 이용은 별도 신청 대상으로 돌린다. 저작권이 소멸한 거장조차 이미지 제공과 유상 이용을 다른 계약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해외 사례가 서울시의 부과나 재단의 면제 요구 중 어느 한쪽을 곧바로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출판사가 책을 만들기 전에 누가 허가하고, 어떤 이용에 비용을 받으며, 수익을 어디에 쓸지를 정해 놓았다는 차이가 있다.


재단은 분쟁조정을 신청할 예정이고 서울시는 유상 판매분에 대한 부과 방침을 유지하고 있다. 2017년 유족이 "행사하지 않을 거라면 돌려달라"고 했던 저작권은 9년 뒤 유족 재단이 만든 도록을 상대로 행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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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 한 저작권 전문가는 "해외 주요 작가재단은 저작권 행사와 학술 이용, 국제 출판을 하나의 창구에서 조정한다"며 "천경자 사례는 저작권자는 서울시, 작가 연구와 해외 출판은 재단으로 갈라진 상태에서 사전 협의 규칙이 작동하지 않아 생긴 분쟁"이라고 말했다. 이어 "쟁점은 1210만원의 많고 적음보다, 한국 거장의 유산을 누가 어떤 기준으로 관리하고 활용할 것인지에 있다"고 했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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