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도 피하는 '낮 크리처'
나홍진이 정면으로 부딪힌 이유

영화 '호프' 스틸 컷.

영화 '호프' 스틸 컷.

AD
원본보기 아이콘

크리처 영화에는 암묵적인 계산이 있다. 컴퓨터그래픽(CG)에 들어가는 비용과 위험을 줄이기 위해 괴물을 어둠 속에 둔다. 빛이 적을수록 세부 표현을 다 채우지 않아도 되고, 결함도 쉽게 감출 수 있다. 제작비도 크게 아낄 수 있어 할리우드 대작들도 중시한다. 나홍진 감독의 '호프'는 이 계산을 거스른다. 3D 크리처를 환한 대낮에 등장시킨다. 거의 모든 장면이 대낮에 진행되는 보기 드문 액션 스릴러다. 무모해 보이는 선택은 CG 하나로 밀어붙인 결과가 아니다. 철저한 사전 제작과 카메라 앞에서 몸을 던진 실사 촬영이 그 뒤를 받친다.



실사와 사전 제작


영화 무대인 항구 마을 호포항 세트는 전남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 실제로 지어졌다. 2023년 10월부터 약 3개월간 주연 배우들이 머물며 촬영했다. 마을 전경을 통째로 구현해야 했던 만큼,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는 부지를 3D로 정밀 스캔했다. XR테크랩의 스캐너 리글 VZ-400i로 뽑은 이 고해상도 데이터가 CG의 밑그림이 됐다. 이런 방식을 버추얼 프로덕션(VP)이라 부른다. 배경과 괴물처럼 나중에 CG로 채울 요소를 촬영 전에 미리 만들어,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찍는 제작 방식이다. 예전에는 초록 배경 앞에서 허공에 대고 연기하면 몇 달 뒤에 완성된 그림을 확인할 수 있었다. VP는 이 시차를 없앤다.

숲속 시퀀스의 결은 다르다. 성기(조인성)가 말을 탄 채 외계인에게 쫓기는 장면은 루마니아 레테자트 국립공원에서 찍었다. 국내에 없는 원시림 지형과 빛의 질감을 로케이션 촬영으로 해결했다. 홍경표 촬영감독은 인공조명 대신 자연광을 최대한 살렸다. 조인성이 말에서 내려 달리는 차로 옮겨 타는 장면도 CG 없이 실제 연기로 완성했다. 손쉽게 CG로 처리할 수 있었던 장면을 실사로 밀어붙인 선택은 영화 전반의 설득력을 떠받친다.


영화 '호프' 스틸 컷.

영화 '호프' 스틸 컷.

원본보기 아이콘

다만 외계 생명체 구현에는 반드시 CG가 필요했다. 마이클 패스벤더, 알리시아 비칸데르 등 할리우드 배우들은 모션 캡처(신체 동작 기록)와 페이셜 캡처(표정 기록)로 이 존재를 연기했다. 배우의 움직임과 표정 데이터에 괴물의 형태를 입히는 방식이다. 이 기술로 한국 영화에서 시도된 적 없는 규모의 시각특수효과 추격전이 완성됐고, 그 결과물은 어둠이 아닌 대낮 화면에 그대로 노출됐다.

500억의 무게, 논란보다 큰 성취


이 도전에는 뚜렷한 제약이 따랐다. '호프'의 제작비는 약 500억원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는 파격적인 규모지만, 대낮 크리처 CG에 드는 할리우드 대작 예산과 비교하면 넉넉한 편은 아니다. 못지않게 발목을 잡은 변수는 따로 있었다. 나홍진 감독은 "해남 현지 촬영 때 해안 날씨가 시시각각 바뀌어, 같은 시퀀스 안에서도 햇빛과 구름이 계속 달라졌다"고 밝혔다. 이 변화는 CG 합성의 기준값을 컷마다 흔들었다. 반면 루마니아 숲 장면은 이런 변수가 적어, 크리처 CG가 실사 화면에 상대적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나 감독이 "대낮에 외계인을 뛰게 만든 건 내 실수"라고 표현할 정도로, 같은 크리처라도 촬영 환경에 따라 완성도 차이가 났다.


이 변수에 대응하는 방식은 구체적이었다. 완전한 디지털 배경 대신, 실제 세트와 디지털 그래픽을 섞어 크리처를 실사 화면 안에 앉혔다. 크리처가 CG로 통째로 얹힌 것처럼 보이지 않고, 촬영된 마을과 숲 안에 자리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한정된 예산 내에서 이 정도 결과물을 만들어낸 점은 그 자체로 평가받을 만하다.


영화 '호프' 스틸 컷.

영화 '호프' 스틸 컷.

원본보기 아이콘

지난 5월 칸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뒤에도 완성도를 높이는 작업은 이어졌다. 라이팅(조명 합성), 사운드, 색보정에 다시 매달렸다. 컷을 새로 찍거나 크리처를 다시 만든 게 아니라, 이미 확보한 데이터 위에 합성 공정만 순차적으로 쌓아 질감을 끌어올렸다. 실제로 개봉판에서 크리처 VFX는 한층 자연스러워졌고, 크리처끼리 주고받는 대화 음성도 새로 더해졌다. 재촬영 대신 후반 합성으로 부족분을 메운 셈이다.

AD

사전 제작부터 개봉 직전 후반 합성까지, '호프'는 예산 한계를 매 단계 다른 방식으로 넘어섰다. 크리처 CG는 완벽하지 않지만, 그 불완전함은 숨지 않고 도전한 흔적이다. 대낮에 괴물을 세우겠다는 결정만으로도, 다음 한국 영화가 더 과감한 시도를 해볼 여지를 넓혀놨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