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하현규 LG화학 PVC·가소제 개발담당

초고중합도 'HRTP4000 양산
기존 한계 넘는 125도 내열성 확보
초급속 충전 케이블 시장 진출

편집자주K산업의 지형이 급변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시장의 격랑 속에서도 묵묵히 내일을 설계하는 차세대 기술 연구원과 엔지니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대한민국 경제의 실핏줄이자 미래의 한국을 먹여 살릴 진정한 주역들입니다. 아시아경제는 이들의 혁신적인 기술 세계와 미래 비전을 조명하는 인터뷰 시리즈 'K산업, 미래설계자들' 연재를 시작합니다. 열한 번째 주인공은 20년 넘게 PVC 한 우물을 파며 초고중합도 PVC 'HRTP4000'을 자체 개발한 하현규 LG화학 PVC·가소제 개발담당입니다.

하현규 LG화학 PVC·가소제 개발담당이 지난 8일 대전 LG화학 기술연구원 특수파일럿동 PVC분석실험실에서 개발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LG화학

하현규 LG화학 PVC·가소제 개발담당이 지난 8일 대전 LG화학 기술연구원 특수파일럿동 PVC분석실험실에서 개발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LG화학

AD
원본보기 아이콘

PVC는 석유화학 제품 중에서도 가장 흔한 소재로 꼽힌다. 파이프, 바닥재, 전선 피복까지 안 쓰이는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흔하다는 것은 곧 값싸다는 뜻이기도 하다. 원료값이 조금만 흔들려도, 경쟁사가 조금만 더 싸게 내놓아도 수익성이 출렁이는 게 범용 소재의 숙명이다. 최근 몇 년 새 중국발 공급 과잉이 겹치면서 국내 석유화학업계는 이 흔한 소재 하나 팔아 남는 게 별로 없는 처지에 몰렸다.


역설적이게도 LG화학이 이 위기에 내놓은 답은 '가장 범용적인 소재를 고부가로 바꾸는 것'이었다. 2023년 기존 PVC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고중합도 PVC 개발에 성공해 2024년 양산에 돌입했다. 지난 8일 대전 LG화학 기술연구원에서 만난 하현규 LG화학 PVC·가소제 개발담당은 "가장 범용적인 소재도 고부가 제품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개발의 의미를 짚었다. 담담한 말투였지만, 20여년을 PVC 하나에 매달려 온 연구자의 확신이 묻어났다.

2003년 LG화학에 입사해 20년 넘게 PVC 연구개발에 몸담아 온 그는 범용 PVC의 품질 안정성과 생산성을 높이는 연구로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전선·케이블, 자동차, 건자재 등 산업 현장에서 물성 차별화 요구가 커지자 단순한 배합 개선을 넘어 분자 구조 자체를 바꾸는 연구로 방향을 틀었고, 이것이 초고중합도 PVC 개발의 출발점이 됐다.


배합에서 분자 구조까지…"중합도 3000을 4000으로"


하현규 LG화학 PVC·가소제 개발담당이 지난 8일 대전 LG화학 기술연구원 회의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LG화학

하현규 LG화학 PVC·가소제 개발담당이 지난 8일 대전 LG화학 기술연구원 회의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LG화학

원본보기 아이콘

PVC 제품은 여러 원료를 섞어 컴파운드를 만들고 이를 성형해 완성한다. 지금까지 업계는 더 좋은 원료를 섞는 방식으로 열에 견디는 성능을 높여 왔다. 하지만 원료 배합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기존 PVC는 자동차 전선 기준인 105도 이상의 내열성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HRTP4000은 125도까지 견딘다. 그동안 내열성이 뛰어난 다른 소재(XLPE·가교 폴리에틸렌)가 맡아온 영역에 PVC가 처음 들어간 것이다.

핵심은 중합도다. PVC는 작은 기본 단위가 길게 이어진 물질인데 중합도는 이 단위가 몇 개 연결됐는지를 뜻한다. 중합도 4000은 기본 단위 4000개가 이어진 것으로 일반 PVC보다 4배 이상 길다. 길수록 잘 끊어지지 않고 열에도 강하다. 대신 분자끼리 서로 엉켜 가공이 어려워진다. LG화학은 PVC 입자 안에 미세한 구멍을 만들어 다른 원료가 속까지 잘 스며들게 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었다.


기존 중합도 3000 수준 제품이 기술이전을 받아 생산하던 것에 가까웠다면, HRTP4000은 LG화학이 그동안 쌓아온 기술력을 바탕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자체 개발했다는 점에서 무게가 다르다. 2023년 말 시제품으로 고객 평가를 진행해 가능성을 확인했고, 2024년 양산을 거쳐 그해 말부터 판매를 시작했다.


PVC로는 처음 뚫은 초급속 충전 케이블 시장


전기차 충전 시설이 늘면서 케이블 소재에 요구되는 조건도 까다로워지고 있다. 일반·급속 충전 케이블에는 여전히 기존 PVC가 쓰인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많은 전류를 흘려보내는 초급속 충전이 늘면서 열에 강하고 불에 잘 타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게 휘는 소재가 필요해졌다. HRTP4000은 PVC 소재로는 처음으로 이 시장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이 시장은 가교 폴리에틸렌(XLPE)이라는 소재가 맡아 왔다. 분자 사슬끼리 그물처럼 얽어놓은 소재로 열에는 강하지만 한번 굳으면 다시 녹여 쓸 수 없어 재활용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반면 HRTP4000은 이런 처리를 하지 않아 재활용이 가능하고 촉감도 더 부드럽다. 다른 경쟁 소재들과 견줘도 성능이 앞선다. 견디는 온도는 125도급으로 경쟁 소재(105도급)보다 한 단계 높다. 더 부드럽게 휘고 불에 견디는 등급도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하 담당은 "케이블 피복이 불에 타면 화재가 급격히 확산되기 때문에 잘 붙지 않고 연소를 늦추는 특성이 필수적"이라며 "복잡하게 구부러지는 하네스 케이블은 유연성이 떨어지면 크랙으로 인한 스파크 위험이 커진다"고 안전성과 소재의 관계를 짚었다.


시장에서는 유연성과 재활용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다. HRTP 인조가죽과 샤시 개스킷은 분리 공정 없이 재활용이 가능해 유럽의 규제 강화 흐름 속에서 주목받고 있다. 가격은 범용 PVC보다 40%가량 비싸지만 경쟁 소재보다는 30~40% 저렴하다. LG화학은 내열 목표를 125도급에서 150도급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중국과의 경쟁에 대해 하 담당은 "가격으로는 어려운 만큼 중국이 쉽게 따라오기 어려운 고부가 영역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석유화학 연구개발 인력의 70%를 고부가 제품에 투입하고 있다.

AD

가장 흔한 소재인 PVC를 고부가 소재로 바꿔낸 이번 시도는 범용 탈피가 절실한 국내 화학산업에 성공 사례를 제시했다는 평가다. 하 담당은 10년 뒤 화학산업을 이렇게 내다봤다. "맞춤형·친환경·고기능 소재 중심으로 재편되고, 화학산업은 원료 공급을 넘어 에너지 전환과 환경 문제를 푸는 솔루션 제공자로 재정의될 겁니다."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놓칠 수 없는 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