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프라, 건설에서 교체로]④"옹벽 무너지고, 60t 바위 쿵"…'과거 기준' 설계된 도로·방재망의 비명
시간당 100㎜ 극한 호우·장기 폭염 일상화
산사태 피해 복구비 10년만에 11배 급증
극한 강수, 흙 파여나가는 '세굴 현상' 노출
"건설비 예산 1% 충당금으로 인프라 개선"
도로, 상하수도 등 인프라 안전을 위협하는 강력한 요인으로 기후변화를 빼놓을 수 없다. 시간당 100㎜ 안팎의 극한 호우와 장기 폭염이 일상화하면서 도로 사면과 방재 옹벽, 지하 전력망 등 사회기반시설(SOC)의 구조적 취약성이 잇따라 노출되고 있다. 설계 당시 전제했던 기후환경 자체가 완전히 바뀌면서 인프라 안전 기준이 더 이상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기상청이 지난해 발간한 '한국 기후위기평가보고서'에 따르면 1912~2024년 한국의 연평균 지표 기온은 10년마다 0.21도씩 상승했다. 이전 평가(1912~2017년)의 상승 속도(0.18도)보다 16.7% 빨라졌는데, 최근 8년간 기온 상승이 더욱 가팔라진 영향으로 풀이된다. 또 전국 평균 폭염일수 역시 2015~2024년 사이 연평균 15.6일로 기상청 관측 이래 최장기간을 기록했다. 과거 장기간 이어지던 장마는 짧은 시간 특정 지역에 폭우가 집중되는 극한호우로 바뀌는 추세다. 연평균 국지성 호우 발생빈도는 2015~2019년 4.2건에서 2020~2024년 7.6일로 확대했다. 지난해 7월17일 하루에만 100년 빈도의 극한호우가 15건 발생해 역대 1위를 기록했다. 이 같은 기후변화는 1970~1990년대 집중 건설한 노후화된 사회 인프라의 취약성을 드러내며 재난 피해를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도로 경사면 '시간당 50㎜' 설계로는 한계
기후변화 충격은 가장 먼저 산지와 도로 사면에서 나타난다. 산림청 '디지털 사면통합 산사태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산사태 피해면적은 612㏊, 복구비는 1855억원으로 집계됐다. 2016년 피해면적(54㏊) 및 복구비(169억원)와 비교하면 각각 11배 안팎 늘어난 규모다. 특히 지난해는 역대 최장 장마가 이어졌던 2020년(피해 면적 1343㏊)보다 피해 면적은 절반 수준이었지만 사망자는 13명에서 17명으로 오히려 늘었다. 넓은 지역에 오래 비가 내리던 양상에서 짧은 시간 특정 지역에 쏟아지는 극한 호우로 패턴이 바뀌면서 작은 규모의 붕괴도 인명 피해로 직결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행정안전부는 최근 10년(2016~2025년) 풍수해로 숨지거나 실종된 199명 가운데 산사태로 인한 인명피해는 85명(42.7%)으로 규모가 가장 컸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전국 상당수 사면과 옹벽이 수십 년 전 시간당 50㎜ 안팎 강우량을 기준으로 설계돼 현재의 극한호우를 충분히 견디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국토안전관리원은 국내 전역에서 5일 최다강수량 등 극한 강수 지표가 급증하게 되면 유속이 급격히 빨라져 교량은 교각 기초의 흙이 파여나가는 '세굴 현상'에 노출돼 전도·붕괴 등 치명타를 입는다고 밝혔다. 도로변 옹벽과 절토 사면 역시 빗물이 대량 침투해 지반 지지력이 급격히 상실되면서 대규모 붕괴와 낙석 피해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2023년 7월 전북 진안군에서는 집중호우로 지반이 약화하면서 60t에 달하는 바위와 토사가 왕복 도로를 덮쳤고 지난해 7월에는 경기 오산시에서 시간당 61㎜ 폭우가 쏟아지자 높이 10m 높이의 고가도로 방재 옹벽이 붕괴했다.
기록적인 폭우가 내린 9일 서울 관악구 신림중학교 인근 야산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관계자들이 신림로에 쏟아진 토사와 나무 등을 치우며 도로를 정비하고 있다./김현민 기자 kimhyun81@
원본보기 아이콘도시의 배수시설과 지하 인프라도 기존 설계 기준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오송 지하차도 참사 진상규명 국정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7월13~15일 사흘간 청주에는 426㎜의 폭우가 쏟아져 3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재산 피해는 755억여원에 달했다. 도심 배수 용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특히 대형 인명 피해가 발생한 오송 궁평2지하차도는 참사 이전까지 침수 이력이 없다는 이유로 지방자치단체 내부에서 '가장 안전한 차도'로 분류돼 방재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당시 무너진 임시제방도 100년 빈도 홍수위(29.30m)를 기준으로 설치됐지만, 실제로는 200년 빈도 홍수위(29.33m)를 넘어선 29.87m의 극한 수위가 발생하면서 속수무책으로 붕괴했다. 과거 기후를 기준으로 설계된 인프라가 극한기후 앞에서는 더 이상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 전력 인프라도 기후변화에는 취약하다. 기상청 전력기상지수(PWI)에 따르면 연평균 전력 부하를 100으로 볼 때 여름철 피크 시간대에는 지수가 200 이상 치솟는다. PWI는 기온·습도 등 기상 조건에 따른 전력 수요 변화를 수치화한 지표로, 평소 두 배 수준으로 전력망에 부담이 집중될 경우 대단지 아파트의 노후 변압기 고장이나 도심 지중 전력케이블 절연체 손상에 따른 정전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과부하는 화재 증가로도 이어진다. 소방청 국가화재정보시스템을 보면 여름철(7~8월) '전기적 요인'으로 인한 화재는 지난해 2464건으로 2020년(2192건) 대비 12.4% 증가했다.
'지방 인프라' 더 취약…구축비용만 최소 6.5兆
노후 기반시설은 지방에서 더욱 심각하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의 '기후변화 및 노후화 대응을 위한 시설물 안전강화 특별법안 검토보고서'를 보면 비수도권 농어촌 지역의 방재를 책임지는 전국 1만7045개 저수지 가운데 무려 96.8%(1만6494개)가 준공 후 30년을 넘긴 초고령 시설이다. 극한호우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기후 대응에 가장 필요한 건 재원이다. 하지만 지자체들의 재정 여건을 고려하면 자체 예산만으로 시설 성능개선을 추진하기는 쉽지 않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지난해 말 전국 취약 시설에 사물인터넷(IoT) 센서 3만3000개와 점검용 드론 100대를 도입하는 등 기후 대응 인프라를 구축 비용을 추계한 결과 2027~2031년 5년간 최소 6조4577억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엄근용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30년 이상 노후화된 인프라의 유지관리·성능개선 비용은 2026~2035년 118조2000억원, 2036~2045년에는 300조원에 달하고, 2050년에는 연간 유지관리비가 52조원 수준으로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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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도 급격한 기후변화 대응에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 극한 홍수 대응을 위해 최신 기후변화 시나리오를 반영해 댐 유역의 가능최대강수량(PMP)을 다시 산정할 방침이다. 또 인공지능(AI) 기반 홍수예보 지점을 2030년까지 270개소 늘리고 국가하천 지능형 AI CCTV도 대폭 확충한다.
엄 연구위원은 "매년 예산 중 건설비의 1%를 성능개선충당금으로 적립하는 최저적립기준 도입해 미래 노후 인프라 성능개선 수요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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