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코리아', 자유 다음 놓인 시험대 그려
혜선의 도전이 묻는 성과사회의 민낯
프레드릭 쇨베르 감독의 영화 '하나 코리아'는 탈북민에 관한 이야기다. 탈북 서사의 익숙한 문법을 따르진 않는다. 국경을 넘는 극적 장면 없이 하나원으로 이동하는 모습부터 보여준다. 정착 초기 과정을 조명하며 남은 삶의 무게를 다룬다.
혜선(김민하)은 간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한다. 하나원 교사들이 더 쉬운 길을 권하지만, 고개를 가로젓는다. 순간 목숨을 걸고 넘어온 그녀는 또 한 번 시험대에 오른다. 국가는 자유를 허락했을 뿐, 자격은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탈출이 첫 관문이라면, 대학 입시와 자격증은 다음 관문이다.
혜선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아르바이트와 취업 경쟁에 짓눌린 도심의 청년들이 혜선 곁을 스쳐 간다. 모두에게 자유와 행복은 다른 말이다.
우연한 병치가 아니다. 한병철은 저서 '피로사회'에서 성과사회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규율사회가 금지와 명령으로 개인을 통제한다면, 성과사회의 개인은 스스로를 경영하는 기업가가 된다.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구분이 사라지고, 각자가 자신을 몰아붙이는 주체로 남는다. 서울 청년들의 스펙 경쟁과 혜선의 자격증 취득은 같은 문법을 공유한다.
물론 성과사회의 경쟁만으로 혜선의 처지는 다 설명될 수 없다. 국가라는 층위가 하나 더 얹혀 있기 때문이다. 국적을 얻었다고 완전한 소속이 보장되지 않는다. 채우지 못한 몫은 악셀 호네트가 말한 인정 투쟁 개념으로 읽힌다. 개인이 타인과 제도로부터 인정받을 때 비로소 온전한 자아를 완성한다는 이론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제도는 혜선에게 법적 국민 자격을 안길 뿐이다. 사회적 인정까지 자동으로 부여하지는 않는다. 간호사 자격증은 법적 지위 다음으로 요구되는 두 번째 인정 절차다. 국경을 넘어 국민이 됐지만, 다시 능력을 발휘해야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
두 겹의 구조는 모두에게 같은 무게로 얹히지 않는다. 혜선과 숙희(김주령)를 나란히 놓으면 드러난다. 혜선은 아직 자격증을 손에 쥐지 못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서사의 중심을 이룬다. 반면 숙희에게는 자격 경쟁에 나설 여유조차 없다.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터라 생존과 그리움 사이에서 하루하루를 버틸 뿐이다. 같은 출발선에서 두 여성은 다른 속도로 걷는다.
실제 정착 통계도 차이를 뒷받침한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2022년 발간한 '남한 내 북한이탈주민의 주거환경 및 지역공동체 조사'에 따르면 탈북민 사회에서는 정착 초기 5년을 '골든타임'이라고 부른다. 놓치면 적응이 급격히 어려워진다는 증언이 반복된다. 한국 문화에 익숙해지는 데 최소 2년, 사람들과 친숙해지는 데 4~5년이 걸린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한 해 탈북민 사망자 열 명 중 한 명은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등졌다.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 부적응을 이유로 지난 5년간 제3국으로 떠난 탈북민도 2166명에 달한다. 정착금과 지원 제도가 있어도, 삶의 궤적은 가혹하다.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아침 2알, 내 단백질" 반숙 달걀의 배신…7월에는...
성과사회라는 틀은 결국 탈북 서사를 국가와 이념의 문제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자격 시스템으로 옮겨 놓는다. 다만 누구나 같은 조건에서 경쟁한다는 착각도 함께 심는다. 공정한 경쟁이라는 약속은 허상에 가깝다. 통계가 증언하는 삶의 무게 앞에서, 혜선의 도전은 아직 절반의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국경을 넘어도 시험대는 끝나지 않는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