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흑자 커질수록 해외투자도 급증
벌어들인 달러 국내 대신 해외로 유출
원화 약세·환율 괴리 장기화 악순환
국내 투자 늘려 달러 선순환 구조 복원해야
흑자의 쓰임이 한국 경제 미래를 좌우
최근 우리 경제에 낯선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수출은 사상 처음으로 월 1000억달러(1022억5000만달러)를 넘었고, 경상수지 흑자는 연 2500억달러(한국은행 전망)를 향해 가고 있다. 교과서대로라면 달러가 쏟아져 들어오니 원화 가치는 올라야 맞다. 그런데 현실은 반대다. 원·달러 환율은 1500원대 중반의 고공행진을 멈추지 않고 있다. 미국 재무부는 지난 1월 원화 약세가 "한국의 강한 경제 펀더멘털과 맞지 않는다"고 평가했는데, 환율은 그 이후에도 한때 100원 가까이 더 올랐다.
돈의 흐름 때문이다. 단기적으로 봤을 땐, 국내 주가 급등으로 원화자산 비중이 커진 외국인들이 차익실현과 환헤지에 나서면서 환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근원적으로 보면,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가 국내로 돌아오지 않고 다시 해외로 나가는 데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해외주식을 사상 최대 규모로 사들이고, 기업들은 벌어들인 달러를 일부만 원화로 바꾼 채 쌓아둔다. 흑자가 국내 투자와 소비로 흡수되지 못하고 금융계좌를 통해 곧바로 유출되는 구조가 지금과 같은 역설적 현상을 낳고 있다. 외국인의 리밸런싱 수요는 언젠가 안정되겠지만, 흑자가 국내로 돌아오지 않는 현상은 구조적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현장 전문가들의 시각도 이동했다. 전례 없는 반도체 흑자 기조가 나타나자 처음에는 많은 이들이 통화가치 절상으로 다른 제조업의 수출 경쟁력이 위축되는 '네덜란드병'을 걱정했다. 그러나 이런 예상과 달리 고환율이 지속되자 이번에는 반대로 '타이완병'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타이완병은 대만 정부가 자국 통화의 저평가를 사실상 방조해 소비위축과 자원배분 왜곡 등 부작용을 겪고 있다는 유력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의 표현에서 나온 말이다. 대만과 달리 우리 정부가 고환율 기조를 추구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는 의도와 상관없이 비슷해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래도 병 저래도 병'이라는 식의 해석은 곤란하다. 반대로 보면, 예전만큼은 아니라도 고환율이 수출기업에 이롭다는 사실은 분명하고 저환율은 내수와 물가안정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 상황에서 우려할 부분이 있다면 이유를 정확히 짚어야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의 마구드와 소사는 세계 각국의 사례를 분석해, 환율의 높고 낮음 그 자체보다 경제 실질과 어긋난 환율과 큰 변동성이 성장에 더 큰 부담이 된다고 했다. 두 경제 석학, 폴 크루그먼과 리처드 볼드윈의 연구에 따르면, 환율의 출렁임 속에서 한번 무너진 산업 기반과 떠난 공장은 환율이 제자리로 돌아와도 복원되지 않는다.
네덜란드병의 본질은 일시적 호황이 부른 환율 변화가 영구적인 산업구조의 변화를 남긴다는 데 있다. 호황이 지나간 뒤 두 차례의 오일쇼크와 에너지 가격 급락이 찾아왔을 때, 네덜란드는 이미 산업구조가 바뀌어 제조업 경쟁력을 잃은 뒤였다. 환율 왜곡의 문제는 환율이 높든 낮든 한 나라의 경제 체력을 반영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지속될 때 생긴다.
경제 실질과 괴리된 환율이 급변동할 때의 위험은 역사적으로도 사례가 많다. 우리나라가 겪은 1997년 외환위기가 대표적이다. 2022년에는 영국에서 감세안 발표로 정책 신뢰가 흔들리자 파운드화가 폭락하고 국채와 연기금 시장이 마비될 뻔한 일이 있었다. 외환시장은 가격 조정이 빠르고 참여자들의 기대가 출렁이면서 과잉변동(오버슈팅)이나 자기실현적 위기가 현실화되기 쉽다. 지금의 환율에 괴리가 크다면 그만큼 급변동의 위험도 높은 셈이다. 일본의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일본은 1980년대 이후 엔고로 비용 여건이 나빠지자 기업들이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기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2010년대 이후 초엔저 정책을 폈지만, 효과는 잠시뿐이었다. 특히 2021년 이후 엔화 가치가 3분의 1 넘게 떨어졌지만, 수출 물량은 늘지 않았고, 국내로 돌아온 기업도 별로 없었다. 남은 것은 수입물가의 급등이었고 일본의 실질임금은 4년 연속 하락했다. 일본 역시 사상 최대 경상흑자를 내고 있지만, 수익의 상당 부분이 국내로 돌아오지 않아서 나라의 흑자가 가계의 소득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환율 안정화를 가볍게 볼 수 없고 그 이유는 다양하다. 한 가지 더하면, 통화가치 저평가 국가에 대한 국제사회의 견제 움직임이 있다. 중국이 위안화 저평가와 과잉설비 보조금을 결합해 대규모 무역흑자를 유지하며 타국의 제조업 기반을 파괴하는 반칙을 범한다는 인식에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정책당국은 물론, 자유무역을 주장해 온 경제학자들까지 동조하고 있다. 문제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이런 인식을 동맹국에까지 적용한다는 점이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개시한 제301조 조사에서 우리나라도 중국처럼 과잉생산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의심을 제기했다. 억울한 일이지만, 고환율과 무역흑자 확대가 지속되는 외양이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답은 무엇인가. 문제는 환율의 고저가 아니라 환율이 경제 실질을 반영하느냐, 그리고 흑자로 번 달러가 국내 생산능력으로 환류되느냐 여부다. 이를 위해선 첫째, 환율 안정을 위한 정책적 접근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실질과 괴리된 환율이 오래가지 않도록 시장과의 소통, 거시건전성 관리, 외환수급 안정 장치를 긴 호흡으로 정비할 필요가 있다. 둘째, 최근 발표된 '메가프로젝트'처럼 수출기업의 대규모 국내 투자를 이끄는 정책은 흑자로 번 달러를 내수와 인프라로 환류시켜 환율 안정과 성장 기반 확충을 함께 얻는 '일석이조'의 길이다. 셋째, 반도체뿐 아니라 해외 진출 기업의 유턴, 나아가 외국기업의 직접투자까지 활성화되도록 전력·용수·인력·규제·세제 조건을 묶어 혁신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이런 정책들이 결합되고 실행력이 뒷받침되면 시장의 신뢰를 얻고 정책효과도 커질 것이다.
사상 최대의 흑자와 고환율의 공존은 위기로 단정할 일은 아니지만, 방치해도 좋은 신호도 아니다. 흑자 자체보다는 흑자의 쓰임이 문제다. 벌어들인 달러를 해외 금융자산으로 흘려보내는 나라와 국내 공장과 인프라로 바꾸는 나라의 10년 뒤는 같을 수 없다. 기업과 서학개미를 탓하기보다 한국을 가장 매력적인 투자처로 탈바꿈하는 노력이 시급하다. 그래야 흑자가 다음 성장의 밑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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