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과 바르트로 읽는 '맨 끝줄 소년'

넷플릭스 '맨 끝줄 소년'에서 허문오(최민식)는 실패한 작가이자 국문학과 교수다. 강의실 맨 끝줄에 앉은 학생 이강(최현욱)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비밀스러운 수업을 시작한다. 교수가 학생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드라마는 그 전제를 의심하게 만든다. 허문오가 개인 문학 수업을 제안하는 순간, 이강이 "왜요? 저를 좋아하세요?"라고 되묻는다. 순진한 학생도, 반항적인 제자도 아니다. 권력관계가 보이는 것과 다를 수 있음을 초반부터 암시한다.


넷플릭스 '맨 끝줄 소년' 스틸 컷.

넷플릭스 '맨 끝줄 소년'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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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권 안에서 허문오의 위치는 분명하다. 학생의 과제를 평가하고, 재능을 발굴하며, 글쓰기의 방향을 지도한다. 강단에서 나오는 언어에 권위가 있다. 그는 처음에는 교육자로, 이윽고 보호자로 이강에게 말을 건넨다. 이강은 거스르지 않는다. 허문오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골라 돌려준다. 복종처럼 보이지만 실은 장악이다. 제도적 권위가 자동으로 존중으로 전환되던 시대는 끝났다. 권위에 기댈수록 그 발판은 오히려 취약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역전될 여지는 충분하다.

흥미롭게도 그 뿌리는 허문오의 내면에 있다. 그는 20년째 신작을 내지 못했다. 성공한 동기 김수훈(허준호)의 그늘에서 살아왔고, 그 아내는 자신의 첫사랑이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인간의 욕망이 근본적으로 타자의 인정을 향한다고 봤다. 자기의식은 타자의 인정 없이 스스로 확인할 수 없으며, 인정투쟁은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으려는 실존적 몸부림에 가깝다고 해석했다.


허문오가 이강에게서 찾는 것은 재능이 아니라 바로 그 인정이다. 이강의 천재성을 발견하는 순간 교육자의 사명과 소유자의 충동이 뒤섞인다. 이강을 키워냄으로써 자신이 탁월한 감식안을 가진 존재임을 증명하려 한다. 소유를 통해 인정을 얻으려는 욕망, 그것이 균열의 시작이다. 이강의 글쓰기는 그 틈을 정확히 겨냥한다.

넷플릭스 '맨 끝줄 소년'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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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문학 이론가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효과를 '플레지르(Plaisir·문화와 규범의 잣대를 얼마나 잘 구현하느냐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지는 즐거움)'와 '주이상스(Jouissance·문화와 규범을 초월한 원초적이고 본원적인 즐거움)'로 구분했다. 허문오가 이강의 글에 빠져드는 것은 후자에 가깝다.


바르트는 이 같은 포획이 가능한 이유를 '저자의 죽음'에서 찾는다. 여기서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가 아니라 독자가 완성한다는 개념이다. 독자가 자신의 욕망을 투영해 능동적으로 의미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허문오는 이강의 글에서 젊은 시절의 자신과 잃어버린 가능성을 읽는다. 이강을 발굴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인정 욕망을 텍스트 위에 덧씌운 독자에 불과하다. 허문오가 이강의 다음 글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때로는 애원하는 처지가 되는 것은 이 포획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드라마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강이 쓴 모든 이야기가 허구였음을 드러낸다. 그는 처음부터 복수심으로 허문오에게 접근했다. 허문오가 집착한 천재성은 설계된 덫이었고, 인정 욕망을 투영할 텍스트 자체는 실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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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맨 끝줄 소년'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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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오를 무너뜨린 것은 결국 그 자신의 욕망이다. 비단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타인의 재능을 발굴하고 키우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은 강의실에서, 직장에서, 관계에서 끊임없이 작동한다. 허문오는 그 욕망이 가장 극단까지 밀렸을 때 무엇이 남는지를 보여준다. 권력이든 재능이든, 소유하려는 순간 그것에 잠식되기 마련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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