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경 포스코 구매본부 본부장(부사장)
최초 여성CEO·부사장 타이틀
의미 두지 않지만 책임감 있어
보이지 않는 차별, 성과로 극복
"조용한 모범생"이었던 소녀는 국내 철강업계의 유리천장을 깼다. 스스로 앞에 나서기보다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던 그는 수십 년간 현장과 조직을 경험하며 사람을 이끄는 리더로 성장했다. 1990년 포스코에 입사한 이유경 부사장은 포스코 역사상 첫 여성 부사장이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입사 당시만 해도 그는 여성 공채 자체가 드물던 시절 회사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감사했다고 한다. 조직 내에서 앞서 나가겠다는 목표보다는 맡은 일을 성실히 해내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조직을 이끄는 위치에 오르면서 스스로를 변화시켰고, 그 과정에서 리더로서의 역량을 키워갔다. 네 자녀의 육아와 일을 병행하며 회사를 떠나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멘토의 조언과 주변의 신뢰, 가족의 응원은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됐다. 최근 서울 강남구 포스코센터에서 만난 이 부사장으로부터 성장의 과정과 리더십 철학,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커리어에서 가장 큰 변곡점은 언제였나.
▲입사 초기에는 어렵게 들어온 회사인 만큼 잘 버텨야겠다는 생각으로 일했다. 하지만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과정에서 번아웃을 겪었고, 회사를 그만두고 가정에 집중하는 삶을 고민하기도 했다. 당시 실장님의 권유로 잠시 휴직했는데, 막상 쉬어 보니 하루하루가 의미 없이 느껴졌다. 그때 깨달았다. 쳇바퀴처럼 반복된다고 생각했던 일상이 사실은 조금씩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이후 직장생활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의 이유경을 만든 결정적인 경험 같은 게 있을까.
▲특별한 한 번의 성공보다 작은 성공 경험들이 쌓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구매 업무를 하던 시절, 원자재 가격 변동을 예측해 선구매 전략을 제안했고 실제로 원가 절감 성과를 낸 적이 있다. 그 경험을 통해 성과를 내는 방법과 인정받는 과정을 배웠다. 이후에도 새로운 시도를 이어갈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도 직원들에게 '하루에 하나씩 작은 성공 경험을 만들어보라'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부사장님이 입사하셨던 1990년과 현재를 비교할 때, 포스코를 비롯한 산업계에서 여성 인재를 바라보는 시선과 기회는 어떻게 달라졌다고 평가하나.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대졸 여성 공채를 실시한 기업은 대우(현 포스코인터내셔널) 정도밖에 없었다. 이후 포스코가 여성 공채를 시작했다. 직무와 호봉 체계는 동일했지만 사회적 인식은 지금과 크게 달랐다. 당시에는 여성을 '미스 리'라고 부르던 시대였고, 호칭이나 관행 속에서 역할이 제한되는 부분이 있었다. 여성 직원이 잘하든 못 하든 개인의 특성보다 여성 전체의 특징처럼 과대해석되는 경향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기보다 한 명의 구성원, 한 명의 개인으로 평가받는 시대가 됐다. 그런 변화에는 포스코처럼 당시 내부 저항과 부담을 감수하고 여성 채용을 시도한 기업들의 역할도 있었다고 본다.
-포스코 최초 여성 최고경영자(CEO), 최초 여성 부사장이라는 여러 기록을 남겼다. '최초'라는 수식어를 개인적으로 어떻게 느끼는지, 무게감도 상당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최초'라는 타이틀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다만 후배 여성 직원들이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책임감은 크게 느낀다. 제 행동과 성과가 후배들에게 긍정적인 사례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최초'라는 기록보다 그 이후의 길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여성 리더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 어떻게 극복했나.
▲철강산업은 무겁고 차가운 제조업 이미지가 있어 여성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는 인식이 있지만 포스코는 제도적으로 윤리적이고 투명한 문화가 있어 여성에게 어려움이 적다. 어려웠던 건 제도보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 남아 있는 성 편견이었다. 과거 언젠가 한 상사가 여성 직원 비율이 높다는 점을 다양성 측면에서 장점처럼 말하면서도, 여성 직원들은 가정과 육아 부담이 있기 때문에 평가에 상대적으로 덜 민감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제도적으로는 차별이 없어도 보이지 않는 인식의 차별이 존재한다고 느꼈다. 이를 바꾸는 방법은 결국 성과로 보여주는 것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자신이 맡은 일에서 결과물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편견을 극복하려 했다.
-후배 여성 직원들이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은 무엇인가. 어떤 조언을 해주나.
▲후배들이 업무 자체의 어려움보다는 육아기나 가족 문제, 지방 근무로 인한 어려움을 상담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인생을 길게 보라"라고 조언한다. 당장은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어려움이 크지만, 현장 경험은 위로 올라갈수록 큰 자산이 된다. 특히 포스코는 현장이 중요한 회사이기 때문에 현장을 직접 보고 업무를 한 경험과 서울에서 간접적으로 업무를 한 경험은 갈수록 차이가 난다고 설명한다. 또 최근에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처럼 보상이 큰 회사들을 보며 답답함을 느끼는 직원들도 있지만, 긴 시간으로 보면 안정적인 회사의 가치도 크다고 말한다. 포스코는 30년 넘게 임금 지급에 문제가 있었던 적이 없고 성과급 역시 꾸준히 지급돼 왔다. 길게 놓고 보면 안정적으로 직장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회사가 좋은 회사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AI)·디지털전환(DX) 시대에 제조업과 철강업은 어떤 인재를 필요로 하나.
▲앞으로 제조업, 특히 철강업의 경쟁력은 제철소의 자동화와 AI화에 있다고 본다. 제철소에는 위험 설비가 많기 때문에 무인화를 통해 비용을 절감하는 동시에 산업재해도 줄일 수 있다. 포스코도 여러 현장에서 자동화와 AI를 도입하고 있다. 구매본부에서도 구매 업무의 DX를 추진하는 등 사무 분야에서도 AI 활용이 확대되고 있다. 앞으로는 제철소 현장이든 사무 분야든 AI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인재가 각광받을 것이다.
-일과 가정의 균형은 어떻게 맞춰왔나.
▲돌이켜보면 일과 가정 중 일에 더 무게를 둔 편이었다. 스스로는 회사에 70%, 가정에 30% 정도였다고 평가한다. 시어머니의 도움을 받았지만 늦은 귀가와 출장 때문에 아이들에게 충분히 집중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 점은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다만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이 주어지는 만큼 시간이 날 때는 '짧고 굵게' 아이들과 함께하려고 노력했다. 주말에는 아이들과 야외활동을 하며 주중에 부족했던 부분을 보충하려 했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지만, 아이들이 오히려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해줘 위로가 됐다.
-앞으로 더 많은 여성 리더가 나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여성들이 스스로 더 다양한 분야에 과감히 도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조금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도전하는 습관을 통해 역량을 키워야 한다. 여성들이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잘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여성 리더십에 대해서는 더 당당하고 도전적이며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다. 10년 후에는 포스코 사장이나 포스코그룹 회장 후보군에도 여성이 당당히 들어가 있기를 기대한다.
-30년 전 신입사원 이유경에게 한마디 해준다면.
▲"바로 앞 한 발자국에 집중하되, 가끔씩은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며 네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라"라고 말해주고 싶다. 마라톤을 할 때 모자를 쓰면 앞의 10m만 보인다. 그 10m만 계속 가다 보면 어느새 목표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너무 먼 목표만 보면 현실과의 차이 때문에 쉽게 좌절하거나 지칠 수 있다. 그래서 평소에는 눈앞의 작은 목표를 보며 꾸준히 가되, 가끔은 고개를 들어 방향이 맞는지 점검해야 한다. 그렇게 가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이 그리던 미래가 현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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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 여성 리더들에게 책을 추천한다면.
▲댄 왕의 '브레이크 넥'이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의 경쟁 구도, 양국의 강점과 약점, 중국이 어떻게 부상했고 미국의 제조 기반이 어떻게 약화됐는지를 알기 쉽게 보여주는 책이다.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인사이트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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