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휘면 처참하게 무너진다…삼전·하닉 반도체 패권 승패 가를 복병은[칩톡]
메모리 고단화·초박화로 압력 버티는 힘 약해져
"패키징 단계에서도 심각한 문제"
전공정 BSD·후공정 유리기판 채택 증가 전망
인공지능(AI) 반도체가 세대를 거듭할수록 글로벌 제조사들의 골머리를 썩이게 만드는 복병이 있다. 반도체가 감자칩처럼 구겨지고 휘어지는 '워피지' 현상이다. 칩을 더 많이 쌓고 더 얇게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리적 뒤틀림을 제어하지 못하면 수율은 처참하게 무너진다. 업계에선 향후 글로벌 반도체 패권의 승패가 이 워피지 현상을 누가 먼저 길들이느냐에 달려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칩 수율 갉아먹는 복병 '워피지'
19일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메모리 제조사들은 최근 고대역폭메모리(HBM) 제조 과정에서 웨이퍼가 휘어지며 발생하는 불량 문제로 머리를 싸매고 있다. HBM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더 높은 대역폭과 용량을 구현하기 위해 전작 대비 적층 수가 늘어나는데, 전체 패키지 높이를 맞추기 위해 개별 다이를 얇게 만들면서 필연적으로 외부 압력이나 내부 변형을 버티는 힘이 약해지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양산 중인 HBM4(6세대)의 경우 국제반도체표준협회(JEDEC)에서 표준 두께를 775㎛(마이크로미터)로 완화했음에도, 16단의 D램을 한정된 공간에 쌓기 위해선 개별 칩을 30㎛ 안팎까지 얇게 갈아내야 하는 상황이다. 이는 머리카락 굵기의 3분의 1 수준이다. 낸드 플래시 역시 300층을 넘나드는 3D 형태로 고단화되면서 미세한 박막을 수백 번 쌓게 되는데, 이때 응력이 한쪽으로 누적되면 워피지 현상에 취약해진다. 종이 한 면에 풀을 과도하게 바르면 종이가 돌돌 말리는 원리와 비슷하다.
박준영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최근 HBM4와 낸드를 중심으로 웨이퍼 워피지 현상과 이로 인한 수율 저하 문제가 지속적으로 대두되고 있다"며 "이는 메모리 제조사들의 수익성은 물론 고객사 입장에서 비용과 납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 현재 매우 중요한 현안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웨이퍼 단계에서의 워피지 문제를 해결해도 난관은 여전히 남아있다. 열압착(TC) 본딩으로 칩과 칩을 접합할 때는 물론, 완성된 HBM을 그래픽처리장치(GPU), 중앙처리장치(CPU) 등과 함께 기판 위에 실장 하는 패키징 단계에서도 열과 압력에 칩들이 뒤틀리는 '워피지 지옥'이 또다시 펼쳐질 수 있어서다. 특히 엔비디아의 루빈 플랫폼처럼 최신 HBM이 대량 탑재되는 AI 가속기의 경우 막대한 고열을 뿜어내기 때문에 보강재 없이 기존 플라스틱 기판(유기)만으로는 형태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윤창민 인하대학교 고분자공학 교수는 "실제로 워피지 현상은 전공정 보다는 패키징 단계에서 더 심각한 문제"라며 "후공정에서 사용되는 소재들이 전공정보다 두께가 훨씬 두껍고 인쇄회로기판(PCB), 에폭시 몰딩 컴파운드(EMC), 언더필 등 저마다 열팽창계수도 제각각이어서 워피지가 수백 배는 더 많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해결의 열쇠는?…전공정의 BSD, 후공정의 유리기판
전공정 단계의 워피지 문제를 해결할 구원투수로는 뒷면 증착 장비(BSD)가 거론된다. 웨이퍼 앞면에 쌓인 박막들이 만든 응력을 뒷면에 그 힘과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보정막을 증착해 워피지를 해결하는 원리다. 한쪽 면에 덧발라진 풀로 말려들어 간 종이의 반대쪽 면에도 적절한 힘을 주는 막을 발라 펴지도록 하는 셈이다.
박 연구원은 "반도체 기술이 웨이퍼는 더 얇아지고, 구조는 더 복잡해지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만큼 워피지 해결을 위해 BSD 장비의 적극적인 도입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며 현재 월간 웨이퍼 투입량 기준으로 낸드는 2500~3000장당 1대, D램·HBM은 5000~7000장당 1대 수준의 BSD 장비 수요가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후공정 단계의 워피지 문제를 타개할 열쇠 중 하나로는 유리기판이 꼽힌다. 플라스틱 계열의 기존 유기기판은 패키지 면적이 넓어지고 고온의 발열이 가해질수록 워피지에 취약하지만, 유리는 소재 특성상 내열성이 높고 표면이 평탄해 물리적 뒤틀림을 억제하는 데 유리해서다. 무엇보다 유리는 실리콘 칩과 열팽창 계수가 비슷해 고온에서도 워피지 현상 90% 이상 줄일 수 있고, 소재 자체가 단단해 대형 패키지에서도 평탄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평가다.
업계 관계자는 "엔비디아가 블랙웰이나 베라루빈까지는 생산성과 시장성이 입증된 FC-BGA를 보강해서 쓰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서도 "루빈 울트라 등 탑재되는 칩이 비약적으로 증가할 차기작부터는 유리기판 도입을 전향적으로 검토할 것"으로 내다봤다.
유리기판 선점 경쟁…국내는 3파전
이처럼 유리기판이 AI 반도체 시장의 게임 체인저로 떠오르면서 관련 국내 기업들의 움직임도 분주해지는 분위기다. 최근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TSMC가 유리기판의 유의미한 상용화 검증 성과를 공개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시장 선점을 위한 경쟁사들의 추격도 한층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국내 기업 중 유리기판 상용화 단계에 가장 근접한 기업으로는 SKC가 꼽힌다. 미국 자회사 앱솔릭스를 통해 조지아주에 세계 최초로 유리기판 전용 공장을 건설한 SKC는 최근 일각에서 제기된 미국 2공장 증설 백지화 우려를 일축하며 양산 인프라 중심의 속도전을 펼치고 있다. 현재 미국 통신 반도체 기업에 단순한 구조로 수율 확보에 유리한 '논 임베딩' 형태의 시제품을 공급하며 신뢰성 평가를 진행 중이다. 연말까지 검증이 마무리되면 2027년부터 본격적인 상용화를 추진할 것으로 전망된다.
세종시에 시범 생산 라인을 갖춘 삼성전기는 유리 구멍을 정밀하게 뚫는 독보적인 가공 기술력을 바탕으로 소재부터 공정까지 아우르는 턴키 체계를 구축한 상태다. 2027년 이후 양산을 목표로 글로벌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 고객사들에 유리기판 샘플을 공급하고 있다. 경쟁사인 LG이노텍도 구미에 연구개발(R&D) 파일럿 라인을 구축해 기술 개발 트랙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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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 관계자는 "유리기판 시장은 단순히 기술력을 선언하는 단계를 지나 실제 샘플 공급과 고객사 퀄 테스트 통과라는 구체적인 레퍼런스 싸움으로 전환됐다"며 "글로벌 빅테크의 공정 생태계 내에 핵심 소모품이나 소재로 진입해 장기적인 반복 매출을 일으키는 기업들이 최종 패권을 쥐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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