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 쟁반 이고 잰걸음…40년 지킨 시장 유산
상권 침체에 매출 반토막…"밥값부터 절감"
e커머스 공습·공실률 몸살…자영업자 '한계'

"첫째 태어나고 일곱 살 때 굶기지 않으려고 시작했어. 뭐라도 해야 하니까. 우리 아기? 벌써 쉰한 살이야."


지난 16일 정오 무렵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 낮 기온이 32도에 육박하는 초여름 더위 속에서 만난 오희자씨(76)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44년째 시장 골목을 누벼온 '쟁반 배달원'이다.

한 손에는 손글씨로 주문이 적힌 비표를 든 채, 머리 위에는 양은 쟁반 세 개를 겹겹이 이고 잰걸음으로 나아갔다. 쟁반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과 국, 계란말이를 포함한 다섯 가지 반찬이 담긴 백반 한 상이 위태로우면서도 노련하게 중심을 잡고 있었다. 복잡한 인파를 피해 오씨가 다다른 곳은 길가의 작은 복권 판매점. 점심시간이 되면 상인들은 그가 나르는 8000원짜리 백반으로 끼니를 해결한다.

44년째 남대문시장에서 쟁반 배달 일을 하고 있는 오희자씨(76)가 지난 16일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 갈치골목에서 머리에 양은 쟁반을 이고 배달에 나서고 있다. 박호수 기자

44년째 남대문시장에서 쟁반 배달 일을 하고 있는 오희자씨(76)가 지난 16일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 갈치골목에서 머리에 양은 쟁반을 이고 배달에 나서고 있다. 박호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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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향한 곳은 4층짜리 노후 건물 꼭대기의 옥탑방 금은방 공장. 통로가 좁고 경사가 가팔라 맨몸으로 오르기도 힘든 계단이지만 오씨는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3시에 퇴근할 때까지 하루 걸음 수는 5만보가 넘는다. 2시간 넘게 뒤따르던 기자가 땀을 쏟자 오씨는 "나 따라다니다 쓰러진다"며 웃음 지었다.

이렇게 종일 시장 바닥과 계단을 오르내리고도 오씨가 받는 일당은 9만원이다. 시급으로는 1만5000원꼴이다. 오씨는 "나는 나이도 많아 단골들한테 아홉개(9만원)만 받지만, 갈치골목 중국집 언니는 새벽 6시에 나와 오후 2시까지 일하며 열다섯개(15만원) 받는다"고 전했다.

지난 16일 점심시간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 갈치골목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자 한 상인이 가게 앞에서 손님을 부르고 있다. 박호수 기자

지난 16일 점심시간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 갈치골목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자 한 상인이 가게 앞에서 손님을 부르고 있다. 박호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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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만난 한 여성 중국인 배달원(62)은 "2년 전 일했던 요양병원보다 자유롭게 골목을 누빌 수 있어 이곳이 더 좋다"고 평했다. 다만 부상 위험은 늘 따른다. 그는 "처음 배달을 시작했을 때 중심을 잃고 넘어져 뜨거운 국물을 온몸에 쏟아 한 달 넘게 입원했다"고 털어놨다.


과거 남대문시장의 점심시간은 이들이 나르는 밥 냄새와 그릇 부딪히는 소리로 활기가 넘쳤다. 1980~1990년대 전국 보따리상들이 몰려들고,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하루 고객만 60만명을 넘겨 '동양 최대 시장'으로 불리던 시절의 유산이다. 최근에는 오씨와 같은 쟁반 배달원이 외국인 관광객들의 숏폼 영상 소재로 등장하며 '원조 K배달'로 주목받고 있지만, 정작 시장 안에서는 소리 없이 멸종 위기를 맞고 있다. 상권이 쇠퇴하며 배달 주문 자체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과거 수십 곳에 달하던 쟁반 배달 식당도 이제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의 한 의류매장에서 상인이 집에서 가져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있다. 박호수 기자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의 한 의류매장에서 상인이 집에서 가져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있다. 박호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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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복합적이다. 장기 불황으로 시장을 찾는 손님 발길이 뚝 끊기자 매달 수백만 원씩 하던 점포 매출은 반 토막이 났다. 당장 임대료 내기도 벅차진 상인들은 하루 지출 중 밥값부터 줄이기 시작했다. 8000원짜리 백반 한 그릇을 시켜 먹는 것조차 사치가 되면서 상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집에서 직접 반찬통을 싸 들고 출근했다.

실제 이날 기자가 찾은 일부 수입 도매 상가 복도는 대낮임에도 한산한 모습이었다. 이 상가에서 37년간 의류를 팔아온 김순명씨(69)는 "1980년대만 해도 인파에 떠밀려 다닐 정도로 활기찼는데 코로나19 때보단 회복했지만 여전히 경기는 안 좋다"며 한숨을 쉬었다. 여성복 상인 박모씨(73)는 "30년 전엔 서울 아파트 한 채 값을 권리금으로 주고 들어왔는데 지금은 보증금이라도 건져 나가고 싶어 하는 상인이 수두룩하다"고 토로했다. 남대문상인회에 따르면 올해 초 시장 상가 평균 공실률은 약 19%다. 숙녀복 등 일부 비인기 상가는 50%에 이른다. 중국계 초저가 e커머스와 온라인 쇼핑 확산, 상권 노후화 등이 시장의 숨통을 조인 탓이다.

지난 16일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 내 한 백반집 주방. 다음 달 폐업을 앞둔 업주는 "타이밍 좋게 떠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박호수 기자

지난 16일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 내 한 백반집 주방. 다음 달 폐업을 앞둔 업주는 "타이밍 좋게 떠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박호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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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이 끊기면서 과거 수십 곳에 달하던 쟁반 배달 식당도 줄어들었다. 손님이 끊기자 배달원들의 거점이던 식당도 하나둘 문을 닫고 있다. 시장 건물 안 백반집을 운영하는 박모씨(75)는 다음 달 가게를 접기로 했다. 그는 "하루 70그릇을 팔아도 재료값과 인건비를 빼면 남는 게 없다"며 "집도 가게도 내놓고 시골로 내려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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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고유가·고환율 충격이 외식·서비스 물가로 전이되며 전통시장 자영업자들이 한계 상황에 몰렸다고 진단한다.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비용 절감을 돕는 유통 구조 혁신과 현실적인 생존 전략 마련이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박호수 기자 lak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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