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차권등기 말소에 악용된 위조 전자문서
종이만 문서…낡은 해석이 만든 사각지대
디지털 시대 못 따라간 법 체계 손질해야
"남의 인생이 걸린 도장을 제멋대로 만들어 찍었는데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지난달 19일 아시아경제가 보도한 '전세사기 피해자 전자문서 위조…종이 아니라는 이유로 불기소' 기사의 취재 과정에서 만난 피해자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동의 없이 위조된 전자문서로 임차권등기가 말소되는 일을 겪었다. 집주인 측 법무사가 피해자의 도장 이미지를 포토샵으로 만들어 임차권등기명령 해제신청서와 위임장을 작성한 뒤 파일을 법원에 제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짓을 벌인 법무사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사문서위조죄에서 규정하는 '문서'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검찰 판단이었다. 종이문서가 아닌 전자문서이기 때문이란 이유였다.
전자문서의 문서성을 부정하는 대법원 판례는 2006~2007년 나왔다. 당시 대법원은 컴퓨터 화면에 나타나는 전자기록을 형법상 문서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그 판례가 만들어진 시대와 지금의 현실이 크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당시만 해도 전자소송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이었고 전자계약과 모바일 전자문서도 보편화하지 않았다. 지금은 수사기관이 법원에 청구하는 영장도 전자 시스템으로 처리된다. 금융 업무 등 공공행정 대부분이 전자문서로 이뤄진다.
전자기록을 조작한 범죄를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수사기관은 사안에 따라 공전자기록위작죄 등 다른 구성요건을 적용해 왔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이마저도 적용하기 어려운 사각지대에 놓였다. 법원 전산시스템에 저장된 공식 기록이 아니라고 봤기 때문이다. 결국 타인의 이름과 도장을 도용했는데도 형사처벌은 쉽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현행 법체계는 행위와 책임의 연결고리가 뒤틀릴 수 있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예컨대 집주인 측 법무사가 위조 도장이 첨부된 파일을 컴퓨터에 저장해두고, 사무실 직원에게 출력만 지시한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법조계에서 적용되는 판례에 따르면 위임장 내용을 조작한 법무사보다 단순히 출력 업무를 수행한 직원의 행위가 문서위조죄 성립과 더 밀접하게 연결된다.
보도 이후 주택도시보증공사(HUG)는 해당 피해자에게 보증금을 다시 청구하지 않기로 했다. 집주인과 법무사를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다행스럽지만 피해자는 당연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했고 공공기관은 불필요한 행정력을 소모했다.
전자문서는 사회의 기본 인프라다. 처벌 규정과 권리보호 장치가 여전히 종이문서 시대의 틀에 머물러 있다면 이 같은 피해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20년 전 판례가 오늘의 현실까지 설명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전자문서 위조에 대한 처벌 공백을 하루빨리 보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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