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산업 전반과 연관 깊은 석유
이란전쟁 장기화시 에너지 대란 우려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
■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미리 PD
■ 출연 : 이현우 기자
이란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그 여파가 일본 서민 경제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그동안 중동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인도나 파키스탄 등이 주요 피해국으로 거론됐지만, 이제는 일본도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다. 특히 바나나, 키위 같은 열대과일과 여름철 필수품인 아이스크림의 수급에까지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석유 수급 문제가 생활물가 전반으로 번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식품산업에 깊게 관여돼있는 석유…아이스크림 재료도 만들어
열대과일과 아이스크림이 석유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얼핏 이해하기 어렵지만, 알고 보면 이들 식품 산업에 석유가 생각보다 깊게 관여돼 있다.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샛노란 바나나는 사실 동남아 등 열대 지역에서 완전한 녹색 상태로 수입된다. 이를 노랗게 익히는 후숙 과정에는 에틸렌가스 주입이 필수인데, 이 에틸렌가스의 주 원료가 바로 석유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나프타다. 일본은 나프타 거의 전량을 중동에서 수입해왔기 때문에 지금 에틸렌가스 확보도 어려운 상황이다.
후숙이 되지 않은 바나나는 상품성이 없어 판매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문제는 바나나에만 그치지 않는다. 키위, 망고 등 대부분의 열대과일이 같은 방식으로 유통되기 때문에 열대과일 전반의 공급 대란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스크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모든 아이스크림의 기본이 되는 바닐라 향신료는 천연 바닐라의 경우 가격이 매우 비싸기 때문에, 대부분의 제조업체들은 화학약품인 벤젠을 주 원료로 한 합성 바닐라를 사용한다. 이 벤젠의 원료 역시 나프타다. 결국 나프타 수입 대란이 과일과 아이스크림 같은 여름철 필수 식품의 수급에까지 직격탄을 날리고 있는 셈이다.
나프타 수급 부족의 여파는 식품 분야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일본 식품업체 가루비는 자사 감자칩 포장지의 로고를 나프타를 원료로 하는 잉크 수급 우려를 이유로 채색 없이 흑백으로 출시하겠다고 발표해 큰 논란을 빚었다. 나프타는 플라스틱과 합성수지, 인쇄잉크, 도료, 포장재 등 산업 전반에 걸쳐 사용되는 핵심 원료인 만큼, 앞으로 수급 부족 우려는 더욱 확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나프타 중동의존도 매우 높은 日…타국보다 피해 큰 상황
같은 동아시아 국가임에도 일본이 유독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의 경우 나프타 수입량은 전체의 45% 수준이며, 나머지 55%는 자체 생산으로 충당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나 미국 등지에서 석유를 수입해 아시아 지역에 정유 제품을 공급하는 대규모 석유화학단지를 보유하고 있어서다. 또한 수입 나프타도 상당 부분을 미국산으로 이미 대체해 놓은 상황이라, 일본과 같은 수준의 위기로까지 번지지는 않고 있다.
중국 역시 전체 석유 소비량의 30%를 자국산으로 충당하고 있으며, 대규모 석유화학단지를 바탕으로 나프타 자급률이 높아 버티고 있다. 대만은 반도체 산업이 핵심인 만큼 나프타 수급이 사실상 생명선이나 다름없어, 애초부터 러시아산 나프타를 대체재로 대거 활용해왔다. 미국도 대만의 러시아산 나프타 수입에는 제재 예외를 인정해줬다.
반면 일본은 나프타 자급률이 30% 수준에 불과한 데다, 수입 나프타의 대부분을 아랍에미리트 등 중동 국가에서 들여왔다. 일본 내에서도 한국처럼 미리 미국산 나프타로 공급선을 다변화했어야 하는데 그동안 너무 안일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일본 정부가 내놓은 대책의 핵심은 수입 다변화다. 현재 중동산 나프타 수입량이 70% 이상 감소한 상황에서, 미국·알제리·호주·페루 등 각지에서 물량 확보에 나서고 있다. 정부는 미국산 나프타 수입을 전년 대비 200배 이상 늘리고, 자국 내 전략비축유를 방출해 화학공장들의 나프타 생산을 독려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를 통해 당장의 수급 위기는 넘길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다.
하지만 이 같은 대책도 전쟁 장기화 앞에서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나프타 부족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인 만큼, 일본의 마구잡이식 매입이 오히려 국제 나프타 가격을 끌어올리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일본이 국제 시장에서 대규모 사재기에 나서면, 나프타 수입 의존국들도 물량 확보 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어 결국 재정 부담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커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동아시아 내에서는 이미 나프타 확보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으며, 중국에 이어 한국도 나프타 대외 수출을 한시적으로 차단하기로 했다. 내수 물량도 부족한 만큼 한동안 수출이 어렵고, 오히려 물량 확보 경쟁에 적극 뛰어들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란전쟁 7월 이후까지 지속될 경우 에너지난 심각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해법은 미국과 이란의 종전 합의를 통한 호르무즈 해협 봉쇄 해제다. 다만 합의가 이뤄지더라도 수급 정상화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란이 해협 곳곳에 설치한 기뢰를 제거해야 하고, 현재 발이 묶인 수천 척의 선박이 빠져나간 뒤에야 항로가 재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7월 이전에 종전 합의가 이뤄질 경우, 이후 약 두 달간의 항로 정상화 작업을 거쳐 연내 수습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7월을 넘기게 되면 원유 수급 문제가 본격적으로 심각해질 것으로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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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의 이란 해상 봉쇄 조치가 시작된 지 약 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미국산을 대체재로 활용하고 러시아산 제품에 대한 제재를 한시적으로 완화하는 방식으로 당장의 공급 위기는 넘기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 같은 대체 공급으로 위기를 버틸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3~4개월로 평가된다. 7월 이후부터는 각국이 전략비축유를 써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는데, 전략비축유는 말 그대로 전시를 대비해 비축해 놓은 것인 만큼, 이것까지 소진되면 사실상 다른 대책이 없다는 게 문제다.
전략비축유 사용이 시작되는 시점부터는 강도 높은 에너지 절감 정책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공공기관과 공기업의 에어컨 사용 시간 제한, 이미 시행 중인 차량 5부제의 추가 강화, 필수재가 아닌 제품의 잉크 사용 제한 등 다양한 조치가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서민 경제가 크게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 역시 이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에서, 상황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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