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죽었어야 했다"…'군체' 채서은이 밝힌 빌런의 내면[라임라이트]
분노 유발 캐릭터, 그 안에 감춰진 결핍 서사
대사 고치고 이름 짓고…평면적 악역 구체화
영화 '군체'에서 가장 분노를 유발하는 캐릭터는 좀비가 아니다. 일진 소녀 박나윤(채서은)이다. 왕따 이소은(이담희)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생존자 그룹에 계속 민폐를 끼친다. 서사의 편의를 위해 지나치게 소비된다.
배우 채서은은 평면적인 인물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이름부터 직접 지었다. 시나리오에는 '일진 소녀'로만 쓰여 있었다. 별다른 설명도 없어 캐릭터를 하나씩 만들어갔다. "처음에는 김미정으로 준비해 갔어요. 연상호 감독님 작품에 그 이름이 나쁜 역할로 자주 등장하더라고요. 그런데 나윤이 더 그럴싸해 보이더라고요. 함께 호흡을 맞춘 이담희, 김성도 학창 시절 그 이름을 가진 일진이 있었다고 얘기해줬고요."
연 감독이 이름을 넣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예전에 어떤 작품에서 눈에 띈 배우를 섭외하려고 하셨는데, 엔딩 크레디트에 배역 이름만 있어서 못 찾으셨데요." 이름을 지워야 오히려 배우가 더 잘 보인다는 역설이었다.
삭제된 서사
관객이 알 수 없는 장면이 있다. 박나윤과 이소은이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사이라는 점이다. 오디션 대본에도 있었고, 실제 촬영까지 했으나 편집됐다. "이소은에게 사과하는 장면에서 말해요. 네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인기를 얻으니까 끌어내리고 싶었다고, 너무 미안하다고요. 전개상 갑작스러운 이야기라서 잘린 듯해요."
박나윤의 괴롭힘은 단순한 악의가 아니라 결핍에서 비롯된 왜곡된 질투였다. 채서은은 이에 맞는 얼굴과 행동을 준비했다. "시종일관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캐릭터예요. 이소은은 따돌림을 당하지만, 대범하고 진취적이잖아요. 오히려 박나윤이 소심하고 나약해요."
그는 인물 분석 노트에 '이미 죽었어야 했는데, 자꾸 사람들이 살려준다'고 적었다. 살고 싶은 의지는 강하지만, 이를 위해 하는 행동은 전혀 없는 인물. 번번이 살아남는 건 다른 사람들의 희생으로 생긴 우연이었다.
마냥 수동적인 인물은 아니다. 지하 주차장에서 이소은이 "지금 정신 안 차리면 죽어"라고 말하는 순간 능동적으로 변화한다. "나보다 약하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조언에 정신을 차린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이어지는 연기에서 눈으로 총기를 표현하려 애썼고요. 클로즈업 샷이나 바스트 샷으로 담기지 않아 눈에 띄진 않지만, 일정하던 흐름에 변화를 줬죠."
박나윤은 이소은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좀비가 달려드는 순간 그녀를 방패막이로 삼는다. 채서은은 "사과도, 배신도 모두 진심"이라고 말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만, 위험한 순간을 모면하는 데 급급한 아이예요. 친구를 버렸으니 결과적으로 갱생에는 실패한 거죠. 제가 연기했지만 괘씸하고 불쌍해요."
캐릭터의 언어
캐릭터를 만드는 작업은 대사에서도 계속됐다. 시나리오에서 박나윤은 이소은과 대화하면서 서영철(구교환)에게 정보를 주지 않기 위해 "저 사람이 들으면 안 되는 말, 나도 안 해"라고 말한다. 채서은은 촬영 현장에서 "경찰도 죽었는데, 넌 어떻게 이 상황에서 그렇게 침착할 수 있어?"로 변경했다. "고등학생인 박나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 형사의 죽음이라고 생각했어요. 혼란한 상황에서 단호한 태도나 용기가 나오기 어렵다고 봤죠."
그는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에도 공을 들였다. 황급히 엘리베이터로 이동하다가 좀비와 부딪쳐 넘어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좀비를 충분히 피할 수 있을 만큼 탈출로가 넓어 뒤를 보다가 넘어지는 설정을 추가했다. "생존자 그룹에서 가장 겁이 많잖아요. '혹시 좀비가 따라오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에 뒤를 돌아보다 충돌하면 개연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준비한 연기를 해내지 못한 장면도 있었다. 좀비가 얼굴 앞까지 다가와 냄새를 맡은 장면이 그랬다. "촬영 전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좀비로 분장한 배우와 정면에서 마주치니 눈물만 주르륵 흐르더라고요. 너무 무서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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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면에서도 애를 먹었다. 겹겹이 껴입은 옷 때문에 좀비가 된 이소은에게 물릴 데가 없었다. 목이냐, 다리냐를 두고 끝까지 고민하다가 촬영에 들어갔다. 연기를 마치고 채서은은 인물 분석 노트에 적었다. '나무보다 숲을 보자.' 이름도 없던 인물을 만들고 나서 얻은 숙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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