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불장이 뒤집은 M&A 시장…SK실트론 딜이 멈춘 이유
'5조' 가격 두고 이견 지속
반도체 호황에 시각차 더 커져
SK 리밸런싱 전략도 변화 기류
서명만 남겨둔 듯했던 SK실트론 매각이 전격 중단됐다. 반년 전만 해도 SK실트론은 SK그룹 리밸런싱의 대표 매물이었으나 인공지능(AI)발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 공급망 가치가 재평가되자, 매각을 결정했던 당시의 계산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것이다.
메모리 호황에 밸류에이션 시각차 커져
4일 IB업계와 재계 의견을 종합하면 SK그룹은 SK실트론 매각 계획을 전면 재검토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두산그룹은 글로벌 3위 반도체 웨이퍼 제조사인 SK실트론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바 있다. 올해 5월말 거래 종결이 유력하다는 전망까지 나왔으나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표류 중인 상황이었다.
협상 장기화의 밑바탕에는 애초부터 가격에 대한 시각차가 있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SK실트론의 몸값은 5조원 안팎으로 평가돼 왔다. 두산은 SK실트론의 미국 자회사 사업 부진과 향후 투자 부담을 감안해 보수적으로 가치를 산정한 반면, SK는 글로벌 3위 웨이퍼 업체라는 전략성과 장기 성장성을 가격에 반영해야 한다고 봤다.
여기에 AI 메모리 호황이 겹치면서 양측의 눈높이 격차는 오히려 더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IB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는 가격(P)으로 돈을 벌고, SK실트론은 물량(Q)으로 돈을 버는 구조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차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SK하이닉스의 호실적은 AI용 메모리 수요 급증에 따른 가격 상승효과가 크다. HBM을 비롯한 고부가 메모리 제품은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가격이 급등했다. 같은 양을 판매해도 더 많은 수익을 거둘 수 있는 구조다.
반면 SK실트론이 생산하는 웨이퍼는 사정이 다르다. 메모리 가격이 오른다고 웨이퍼 가격이 같은 폭으로 오르는 것은 아니다. 웨이퍼는 장기 공급계약 비중이 높고 가격 변동성도 상대적으로 낮다. 결국 실적 개선은 가격보다 얼마나 많은 웨이퍼가 실제로 사용되고 공급되느냐에 달려 있다. 즉 반도체 호황을 두고도 기업가치 산정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SK그룹 리밸런싱 전략 변화…반도체 초집중
SK실트론 매각은 SK그룹 리밸런싱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됐다. 2023~2024년만 해도 반도체 업황은 침체 국면에 머물렀고, SK그룹은 비핵심 자산 매각을 통해 재무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웨이퍼 가격 하락과 공급과잉 우려, 미국·중국 갈등, 대규모 투자 부담 등도 SK실트론을 보유하는 데 부담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불과 반년 만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AI 열풍과 함께 SK하이닉스는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2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컴퓨텍스 2026' SK하이닉스 부스에서 취재진과 만나 "향후 5년 안에 웨이퍼 생산능력을 두 배로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메모리 병목 현상은 2030년까지 이어질 것"이라며 SK하이닉스의 공격적인 증설 계획을 공식화했다. 업계는 메모리 생산을 늘리려면 원재료인 웨이퍼 수요도 함께 늘 것으로 보고있다.
SK실트론의 전략적 가치를 재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SK그룹 내부에서 커질 수밖에 없다. 반도체 생산의 출발점인 웨이퍼를 공급하는 SK실트론은 단순한 계열사가 아니라 AI 반도체 밸류체인의 핵심축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IB업계 관계자는 "SK실트론 딜이 멈춘 이유는 가격 요소뿐만 아니라, AI로 인한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가격의 기준 자체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기 때문"이라면서 "과거에는 SK실트론이 현금화 가능한 자산 중 하나였다면, 지금은 미래 성장의 기반 자산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셈"이라고 말했다.
주식시장 호황에 M&A 시장 곳곳에서 유탄
한편 최근 M&A 시장에서는 거래 구조보다 가격이 더 큰 걸림돌이 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최근 이지스자산운용 경영권 매각은 기업가치를 둘러싼 이견으로 장기화하고 있고, HS효성첨단소재는 타이어스틸코드 사업 매각을 철회했다. 두산밥캣의 독일 바커노이슨 인수 역시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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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업계 관계자는 "매도자들은 비교 기업 주가 상승을 근거로 몸값 인상을 요구하지만, 매수자들은 높아진 금리와 불확실성을 이유로 보수적인 가격을 고수할 명분이 생겼다"며 "최근 주식시장의 호황이 역설적으로 M&A를 어렵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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