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보물: 한국미술 2000년'
이건희 기증품 순회전
워싱턴 이어 시카고에서도 큰 호응
삼국 시대부터 현대미술까지 아울러
"K컬처 인기 축적된 韓 문화적 자산 창조 역량 결과물"

지난달 15일(현지시간) 미국 시카고미술관 모던 윙. 거대한 '십장생도' 앞에 선 관람객들은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그림 속 동물들을 찾아내고 있었다. 붉은색과 푸른색 안료가 빚어낸 강렬한 색채 속에서 거북이와 사슴, 소나무 등 불로장생의 상징을 발견할 때마다 관람객들의 표정에는 미소가 번졌다. 다음 전시 공간으로 이동하자는 안내가 이어졌지만, 이들은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지난달 15일(현지시간) 미국 시카고미술관 이스트 윙에서 열린 ‘한국의 보물: 한국미술 2000년’에서 관람객들이 십장생도 앞에서 동물을 찾고 있다. 이현주 기자

지난달 15일(현지시간) 미국 시카고미술관 이스트 윙에서 열린 ‘한국의 보물: 한국미술 2000년’에서 관람객들이 십장생도 앞에서 동물을 찾고 있다. 이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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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D.C.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에서 누적 관람객 6만명 이상을 모으며 한미 민간 외교의 장을 열었던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 기증품 순회전 '한국의 보물: 한국미술 2000년'은 지난 3월 시카고로 무대를 옮겼다. 미국 중서부에서도 한국 미술의 저력을 알리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지연수 시카고미술관 한국미술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는 이건희 선대회장 일가의 수집 철학을 한국의 전통문화와 조선 선비들의 사상에 연결해 조명한다"며 "서양의 컬렉팅이 개인의 취향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둔다면, 한국의 전통적 수집은 유교적 가치와 배움에 대한 존중에서 출발했다"고 짚었다.


전시장에는 삼국시대부터 20세기 후반 현대 회화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 2000년의 흐름을 보여주는 문화유산 140건, 257점이 나왔다. 전통·근현대 회화와 도자, 불교미술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국 문화유산의 축적된 역사를 펼쳐 보인다.

한때 개인의 수집품이었던 작품들은 2021년 이건희 회장 유족의 국가 기증을 통해 국민 모두의 문화유산이 됐다. 지 큐레이터는 "책가도에 등장하는 다양한 기물은 학문과 지식을 향한 선비들의 열망을 상징한다"며 "실제로 이건희 컬렉션에는 책가도 속에 묘사된 유물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고 소개했다.


지연수 시카고미술관 한국미술 큐레이터가 지난달 15일(현지시간) 아시아경제와 인터뷰 후 십장생도 앞에서 촬영을 하고 있다.

지연수 시카고미술관 한국미술 큐레이터가 지난달 15일(현지시간) 아시아경제와 인터뷰 후 십장생도 앞에서 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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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한편에는 서양 관람객들에게도 익숙한 도자를 한국적 시선으로 풀어낸 공간이 마련됐다. 그는 "한국 청자는 맑고 투명한 유약이 만들어내는 은은한 빛과 정교한 상감 기법이 특징"이라며 "서양에서는 18세기에야 구현된 기술을 한국은 이미 12~13세기에 완성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고려청자의 화려함은 조선시대에 들어 유교적 가치가 반영된 단아하고 절제된 백자로 이어진다"고 덧붙였다.


특히 '천지현황(天地玄黃)'이 새겨진 백자 대접 가운데 '현(玄)' 자가 다소 비뚤어진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천지현황 명문 백자는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던 최고급 도자기다.


지 큐레이터는 "일본이나 중국이었다면 흠결 있는 도자는 납품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라며 "조선의 궁중에서는 약간 찌그러진 형태조차 포용하고 실생활에 사용했다. 조선 특유의 여유롭고 너그러운 미감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순백의 색감은 소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청자보다 더 많은 노력과 고도의 기술이 집약된 결과물"이라고 부연했다.


미국 시카고미술관에 전시된 백자 '천지현황(天地玄黃)'이 새겨진 백자 대접. 가장 오른쪽에 있는 대접은 玄자가 새겨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미국 시카고미술관에 전시된 백자 '천지현황(天地玄黃)'이 새겨진 백자 대접. 가장 오른쪽에 있는 대접은 玄자가 새겨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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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과 고려 불화를 둘러싼 일화도 들려줬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에는 고려 불화가 한 점도 없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병철 창업회장은 일본 경매에 나온 고려 불화를 매입하려 했지만, 일본 소장가가 한국인에게는 팔 수 없다며 거래를 거부했다. 이에 미국 지사 직원을 통해 작품을 낙찰받았고, 불화는 미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는 해외에 있던 고려 불화가 처음으로 고국에 돌아온 사례로 기록됐다. 지 큐레이터는 "문화재를 되찾겠다는 의지만으로는 어려운 일"이라며 "작품의 예술적·역사적 가치를 깊이 이해하고 애정을 가졌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평가했다.


전시는 일제강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며 이어져 온 한국미술의 궤적도 담아낸다. 1910년대 안중식의 '무릉도원도'에는 국권을 잃은 시대의 아픔 속에서도 평화로운 나라를 꿈꿨던 염원이 녹아 있다.


반면 백남순의 '낙원'은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이 교차하는 작품이다. 전통적인 무릉도원 구도 속에 금발의 이국적인 인물이 등장하고, 서양화 기법과 한국적 미감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지난달 15일(현지시간) 미국 시카고미술관 이스트 윙에서 열린 ‘한국의 보물: 한국미술 2000년’을 보고 있는 관람객들의 모습. 이현주 기자

지난달 15일(현지시간) 미국 시카고미술관 이스트 윙에서 열린 ‘한국의 보물: 한국미술 2000년’을 보고 있는 관람객들의 모습. 이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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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큐레이터는 "병풍처럼 접어 세우는 용도가 아니라 넓게 펼쳐 감상하도록 제작된 작품"이라며 "가장자리에는 나전칠기를 연상시키는 문양을 넣어 서양화를 그리면서도 한국적 정체성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작가의 고민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백남순과 남편 임용련은 한국 최초의 서양화 유학생 부부이자 화가 이중섭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미주 한인들에게도 이번 전시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전시장에서 만난 서혜경씨(72)와 딸 크리스티나 서씨(Christina Sur·33) 모녀의 얼굴에는 벅찬 감동이 묻어났다. 뉴저지에 거주하는 서씨는 전시를 보기 위해 딸이 사는 시카고를 찾았다.


이들은 "이처럼 방대하고 수준 높은 한국미술 작품을 한 공간에서 접한 것은 처음"이라며 "특히 한글의 아름다움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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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를 매료시킨 한국미술의 힘은 오늘날 전 세계를 휩쓰는 'K컬처'의 뿌리와도 맞닿아 있었다. 지 큐레이터는 "외국인들은 K팝을 비롯한 한국 문화가 어떻게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됐는지 궁금해한다"며 "한국의 창조성과 창작 역량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어 "20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축적된 문화적 자산과 창조적 에너지가 오늘날 세계인의 공감을 얻고 있다"고 진단했다.


시카고(미국)=이현주 기자 ecolh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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