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랜드', 1t 금괴가 비추는 욕망의 민낯
사소한 합리화 누적…'악의 평범성' 변주
폐광촌 정산, 트라우마와 산업화 쇠락 응결돼
디즈니+ 시리즈 '골드랜드'의 출발점은 익숙하다. 거액의 돈과 그것을 쫓는 인간 군상. 장르의 문법이 닳을 대로 닳았다. 하지만 단순한 추격 극이 아니다. 욕망이 어떻게 발생하고, 무엇에 의해 통제되며, 어느 지점에서 인간을 삼키는지를 집요하게 해부한다.
금의 무게와 제어장치의 붕괴
여느 범죄물과 달리 '골드랜드' 속 금괴는 가볍게 들고 튈 수 없다. 차에 싣기도 어려운 1t 규모다. 눈앞에 있어도 쉽게 가질 수 없는, 무겁고 거대한 족쇄다. 물리적 중량은 욕망의 형이상학적 중량과 연결된다. 주인공 김희주(박보영)를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던 고향 정산에 결박한다. 가장 갖고 싶은 것이 가장 가기 싫은 곳에 있다는 모순. 욕망이 늘 무소유와 한 몸이라는 역설은 여기서 태어난다.
이 작품이 사유하는 돈의 본질은 통속적 물욕을 넘어선다. 극 중 우기(김성철)의 대사가 핵심을 찌른다. "돈이 왜 좋은지 알아? 하기 싫은 걸 안 할 수 있어서야." 부의 실체가 충족이 아닌 가능성의 소유라는 통찰이다. 돈은 풍요만 보장하지 않는다. 하기 싫은 일을 거부할 자유, 가족에게 온정을 베풀 여유, 어둠의 경로로 문제를 매듭짓는 간명함까지 사들인다. 이렇듯 무한한 가능성을 구매하는 행위이기에, 욕망은 특정 대상의 획득으로 끝나지 않으며 충족되는 순간 또 다른 가능성을 향해 미끄러진다. 희주가 금괴를 손에 쥔 뒤에도 평온함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다.
악인이 탄생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평범한 사람의 윤리적 제어장치가 풀려나가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김성훈 감독은 인간이 크고 작은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되 교육·사회화·도덕이 그 욕망을 조절하며, 자기 통제가 무너지는 순간 사고가 발생한다고 본다. 선하고 평범하던 세관원이 탐욕에 잠식되어가는 단계적 변화를 포착하는 데 역량을 집중한다.
주목할 대목은 김희주의 자기합리화 구조다. 자신을 방치했던 엄마를 뒤늦게 챙기는 행위조차 효심이나 가족애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금을 가질 명분의 조달로 나타난다. 선의의 외피를 쓴 자기 정당화의 메커니즘으로,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의 한국적 변주로 읽힌다. 거대한 악의가 아니라 사소한 합리화의 누적이 한 인간을 나락으로 유도한다.
'오징어 게임'과 무엇이 다른가
이 작품은 자본주의적 욕망의 우화라는 점에서 '오징어 게임'과 한 계보에 놓인다. 모두 끝내 누구도 소유의 최종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욕망을 다루는 방식은 선명하게 갈린다.
'오징어 게임'은 욕망을 외부에서 주입한다. 빚에 몰린 인간을 게임이라는 인위적 시스템에 던져 넣고, 죽음을 건 경쟁을 강제한다. 욕망의 책임은 상당 부분 시스템에 있는 듯 보인다. 참가자들이 희생자에 가까워 비판의 화살이 그들을 벼랑으로 내몬 불평등한 사회로 향한다.
'골드랜드'는 정반대 경로를 택한다. 금은 외부에서 굴러들어왔으나, 그것을 욕망으로 전환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희주 자신이다. 떠나려면 언제든 떠날 수 있었다. 그가 머무는 건 오직 욕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판 역시 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내면을 겨냥한다.
이 차이는 사소하지 않다. '오징어 게임'이 사회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한다면, '골드랜드'는 그런데도 선택한 것은 너 자신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전자가 구조적 비판의 통쾌함을 준다면, 후자는 자기 직면의 불편함을 남긴다. 그런 차원에서 폐광촌 정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김희주의 트라우마가 새겨진 사적 공간인 동시에, 산업화의 쇠락이 응결된 사회적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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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감독은 사회 환경과 무관한 순수한 개인의 욕망이 없다고 본다. 그렇다고 도식적인 답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선하고 정직한 얼굴의 박보영을 앞세워 그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단죄도 옹호도 유보한 채 거대한 탐욕 앞에 마주 선 우리 자신의 민낯을 냉엄하게 비춰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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