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적 구타와 가혹행위 경험 23.3%
"'도와주겠다'며 다가오는 손길 공포"
질병·정신질환 앓아도 치료 사각지대
"잠자리 제공 넘어 맞춤형 개입 절실"

지난달 22일 오후 9시께 서울역 2층 대합실. 연휴를 앞두고 북적이던 역사 한편에 여성 노숙인 이모씨(67)가 앉아 있었다. 남색 티셔츠 소매 끝은 군데군데 닳아 있었고 뒤축이 꺾인 운동화는 발끝에 겨우 걸쳐 있었다. 노숙인을 지원하는 서울역 다시서기 종합지원센터 관계자가 "오늘 밤은 센터에 가서 주무시라"고 권했지만 이씨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무서워서 집에서 도망쳐 나온 건데 (센터에) 들어가서 무슨 일을 당할 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지난달 22일 서울역 대합실에서 만난 여성 노숙인 이모씨(67)가 다시서기 지원센터 이용 권유를 거절한 채 짐을 옆에 두고 앉아 있다. 박호수 기자

지난달 22일 서울역 대합실에서 만난 여성 노숙인 이모씨(67)가 다시서기 지원센터 이용 권유를 거절한 채 짐을 옆에 두고 앉아 있다. 박호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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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무렵 이씨는 차가운 광장 바닥에 신문지와 박스를 깔기 시작했다. 경남 창원시에서 서울역으로 올라와 거리 생활을 시작한 지 2년째라는 이씨는 슬하에 아들과 딸이 있지만,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바닥을 가리키며 "여기는 누가 오고 가는지 다 보이니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이씨의 선택이 서울역 밤거리에선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날 오후 8시부터 이튿날 오전 2시까지 서울역 광장과 서부역 인근 노숙인 텐트촌에서 만난 30여명의 노숙인들은 거리 생활을 시작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이들부터 20년 넘게 생활해온 베테랑까지 뒤섞여 있었다. 그 중에서도 여성 노숙인은 여전히 성범죄와 폭력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일부는 밀집된 시설 환경에서 느끼는 불안감과 정신건강 문제로 다시 거리로 돌아온다.


지난달 22일 오후 11시30분께 서울 중구 서울특별시립 다시서기 서울역희망지원센터 복도에서 남성 노숙인들이 잠을 청하고 있다. 여성 노숙인들은 시설 대신 거리나 광장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지예 기자.

지난달 22일 오후 11시30분께 서울 중구 서울특별시립 다시서기 서울역희망지원센터 복도에서 남성 노숙인들이 잠을 청하고 있다. 여성 노숙인들은 시설 대신 거리나 광장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지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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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에게 "긴팔 옷 하나만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여성 노숙인 한모씨(63)도 상황이 비슷했다. 센터 안에 의류와 지원 물품이 있다는 설명에도 그는 "거긴 안 간다"며 손사래를 쳤다. 거리에선 도움보다 위험이 먼저 다가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했다. 한씨는 "먹고 살기 힘든 여자들 노려서 자신의 기초생활수급비로 "방 잡아줄 테니 따라오라고 접근하는 남자 노숙인들이 많다"며 "술 마시고 잠든 여성 노숙인의 몸을 만지는 일도 흔하다"고 주장했다. 서울역에서 20년 넘게 생활했다는 김모씨(73)도 "도와준다며 접근했다가 해치거나 임신까지 하는 경우도 봤다"고 말을 보탰다.

최근에는 맨발에 노란 원피스 차림의 40대 여성이 남성들 사이에 방치돼 있다가 경찰에 인계됐다는 목격담이 나왔다. 경찰 관계자는 "배가 불러 임신한 것으로 보였지만, 간 질환으로 복수가 찬 상태라 병원 진료를 받고 있다"며 "여성 노숙인 상당수가 망상이나 알코올 의존 증상을 겪고 있어 현장 대응에 어려움이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어 "특히 여성 노숙인들은 폭력이나 학대 피해를 경험한 경우가 많아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크고 도움 자체를 거부한다"며 "법적으로 본인 의사에 반해 강제로 조치하기 어려워 늘 한계를 느낀다"고 덧붙였다.


"누군지 다 보이니 차라리 길바닥이 편해요"…성범죄·폭력에 노출된 서울역 노숙인들 원본보기 아이콘

여성 노숙인의 취약성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4년 전국 노숙인 수는 1만2725명으로 2021년보다 11.6% 감소했다. 전체 노숙인 가운데 여성은 22.4%(2851명)에 불과했지만, 위험 노출도는 더 높았다. 지난해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분석 결과 거리나 일시보호시설에서 생활하는 여성 노숙인의 13.5%는 성추행·성폭행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같은 조사에서 남성 응답자는 없었다. 신체적 구타와 가혹행위 경험도 23.3%로 남성보다 4배 이상 높았다. 정신질환 진단 경험률 역시 51.8%에 달했지만, 실제 치료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서울역파출소 인근에는 다시서기 희망지원센터가 24시간 운영되고 있다. 여성 전용 구호방도 마련돼 있다. 다만 집단생활 공간이라는 특성상 이용을 꺼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13년째 현장을 지키고 있는 한 사회복지사는 "여성 노숙인들은 여러 선택지에서 밀려난 끝에 거리로 오게 된 경우가 많다"며 "단순히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다시 사회와 연결될 수 있도록 관계 회복까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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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 용인정신병원 진료과장은 "정신질환을 겪는 여성들은 범죄에 악용될 위험이 높다"며 "명의를 빌린다며 대포통장을 개설하는 등 사기에 노출되는 경우도 많다"고 경고했다. 이어 "노숙인을 한 집단으로 볼 것이 아니라 경제, 가정폭력, 정신질환 등 거리로 나온 원인부터 구분해야 한다"며 "사회복지사와 의사, 임상심리사 등이 함께 개입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호수 기자 lake@asiae.co.kr
이지예 기자 eas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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