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경제논단]정부 시장개입, 정유·석화에도 분명한 명분이 필요하다
'無자원 산유국' 기적의 주역이지만
가격 담합 등 사회적 인식은 최악
석유제품 최고가격제, 상품 특성 무시한 억지
관련 산업 상생하려면 회생부터
휴전의 출구를 목전에 두고, 중동 전쟁이 갈피를 잡지 못하며 그 먹구름이 쉽게 걷히지 않고 있다. 전 세계는 무겁게 짓눌린다. 지구촌은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로 중동의 원유 공급이 끊긴 이후 기나긴 몸살을 앓고 있다. 다만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4년 전과 같은 극심한 혼란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진단했다. 중동 이외의 소규모 산유국이 반복되는 에너지 파동을 통해 얻은 학습효과를 보고 있다는 분석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이 지속 가능하다고 볼 순 없다. 한계가 분명히 있어, 그다음을 생각해야 한다.
원유의 70%, 천연가스의 20%, 나프타의 35%, 요소의 38%, 헬륨의 65%를 중동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도 중동 전쟁의 충격을 비교적 무난하게 견뎌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름값이 올랐고, 한때 종량제 봉투와 일회용 주사기의 공급난을 걱정했을 뿐이다. 1964년 울산에서 무모하게 시작한 '무(無)자원 산유국의 꿈' 덕분에 벌어지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오늘날 세계 5위의 정제 설비와 세계 4위의 에틸렌 생산 시설을 갖춘 우리나라의 정유·석유화학산업이 국가기간산업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이에 반해, 정유·석유화학산업에 대한 실제 우리 사회의 인식은 최악에 가깝다. 기름값이 치솟기만 하면 정유사의 '담합'을 의심한다. 이번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동 전쟁이 시작되고 한 달 만에 검찰이 정유사와 석유협회에 칼을 빼 들었다.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 때문에 전 세계의 기름값이 수직으로 치솟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은 애써 외면했다. 아직도 검찰이 정유사의 담합 혐의를 확인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돌이켜 보면, 정유·석유화학산업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은 2011년 '기름값이 묘하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엉뚱한 발언으로 시작됐다. 청와대에서 지식경제부로 자리를 옮긴 최중경 장관이 정유사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알뜰주유소를 만들고, 우리 정유사와 경쟁하는 일본 정유사의 경유를 수입하는 일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주유소가 줄줄이 문을 닫았고 최저임금의 주유원이 셀프 주유기에 밀려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습기 살균제 참사까지 벌어지면서 화학산업에 대한 사회적 불신은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됐다. 결국 화학산업을 단단하게 옥죄는 화평법·화관법까지 등장했다.
산업부의 정유·석유화학산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최근 시행돼 지속되고 있는 '석유제품 최고가격제'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최고가격제는 중동 전쟁이 시작되고 고작 2주 만인 지난 3월13일에 정부가 성급하게 밀어붙인 낯선 제도였다. 최고가격제가 사회 안정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정부가 모든 부담을 정유사에 떠넘겨버린 것도 맞다. 정부가 재정을 동원해서 정유사의 손실을 보전해 주는 것은 특혜가 아니다. 석유사업법 제23조에 분명하게 명문화된 제도적 장치에 따른 지극히 당연한 보상이다. 최고가격제 시행에 따른 손실 보전은 기름값의 기준인 싱가포르 국제석유제품 가격(MOPS)을 근거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이 최고가격제 때문에 정유사가 어쩔 수 없이 포기했던 정당한 기회비용이기 때문이다. 정유사의 그런 요구는 절대 부당한 것이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연상품(連商品)인 휘발유·경유·등유의 '원가'를 기준으로 삼겠다는 정부의 주장은 가장 초보적인 회계학 상식에도 맞지 않는 억지다. 휘발유·경유의 원가 논란은 2011년 자신이 '회계사'라는 사실을 강조하던 최중경 장관의 부끄러운 억지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소를 도축해서 생산하는 등심과 갈비도 연상품이다. 부품 가격에 인건비를 합치면 원가가 되는 자동차와 달리 등심과 갈비의 원가는 따로 있지 않다. 도축업자의 입장에서는 등심을 비싸게 팔고, 갈비는 덤으로 줘도 아무 문제가 없다. 연상품의 가격은 시장에서 소비자의 선택을 고려해서 전략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정유사가 대단한 비밀을 감춰두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지난달 23일 서울의 한 주유소에서 운전자들이 주유를 하고 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과 정부, 청와대는 4차 석유최고가격제에 대해 시장 영향, 국제유가, 국민 부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시행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연합뉴스
원본보기 아이콘손실 보전의 기준을 두고 볼썽사나운 논란을 벌일 이유가 없다. 정유사의 손실을 어느 수준으로 보전해 줄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만이 필요할 뿐이다. 실제로 원유를 정제해서 생산한 석유제품으로 수익을 올리는 정유사도 100% 손실 보전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정유사에도 중동 전쟁의 충격으로 고통받는 국민을 위한 통 큰 기여의 기회가 필요할 수 있다. 더욱이 정유 4사가 1분기에 5조9635억원의 예상치 못했던 영업이익을 올린 상황이다. 물론 전쟁 특수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쨌든 정유사가 국민 고통을 외면하고 더 많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 지나친 욕심을 내고 있다는 모함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정작 산업부가 더 심각하게 걱정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경유 가격이다. 중동 전쟁을 통해 국제 시장에서 경유의 가격이 휘발유보다 훨씬 더 높아져 버렸다. 싱가포르 국제석유제품 시장에서 경유는 휘발유보다 33%나 더 비싸게 거래된다. 지난달 6일에는 싱가포르 시장에서 경유가 국내보다 ℓ당 1000원 이상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기도 했다. 미국에서도 경유는 휘발유보다 31%나 더 비싸다. 이제 산업부가 유류세를 통해 경유를 '싸구려 기름'으로 왜곡하는 일이 불가능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정치권의 인식도 왜곡돼 있다. 여당의 을지로위원회(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는 고유가 충격에서 민생을 지킨다는 취지로 정유사와 석유화학업계에 '상생협약'을 압박하고 있다. 대기업인 석유화학기업이 영세한 주유소나 플라스틱 업체와 상생해야 한다는 명분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중국·중동발 공급 과잉과 지나치게 비싼 산업용 전기요금으로 적자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는 석유화학업계가 무조건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실적이지 않다. 석유화학업계의 입장에서는 영세업체와의 '상생'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회생'이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무작정 원재료의 가격 인상을 소급해서 축소하고, 수출을 제한하는 것만이 능사일 수는 없다. 정부와 정치권의 무분별한 시장 개입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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