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Stage]조성하 '비애'·이서진 '냉소'…원작자 체호프는 누구의 손 들어줄까
체호프 고전 '바냐 아저씨' 나란히 무대에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는 삶에 지친 사람들이 비 오는 날 포장마차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는 풍경화의 한 장면 같은 희곡이다. 모두 저마다 탈출구를 꿈꾸지만, 바깥에는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진다. 결국 포장마차 안에서 이 풍진 세상을 잊고자 술잔을 기울일 뿐이다.
LG아트센터와 국립극단이 동시에 바냐 아저씨를 공연 중이다. LG아트센터는 '바냐 삼촌', 국립극단은 '반야 아재'라는 제목으로 극을 올렸다.
두 공연은 무대 연출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LG아트센터 바냐 삼촌의 무대가 추상적이라면, 국립극단 반야 아재의 무대는 구체적이다. 국립극단이 19세기 말 러시아 농촌이라는 원작의 배경을 일제강점기인 1939년 충북 영동군으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무대를 통해 공간 배경이 바뀌었음을 사실적으로 설명해준다. 한국 시골 마을을 연상시키는 담장과, 무대 중앙의 회전하는 누마루, 그 주변으로 펼쳐진 연못이 시대와 공간의 변화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배경이 한국 농촌으로 바뀌면서 바냐라는 이름도 박이보로 바뀌는 등 인물 이름 역시 한국식으로 각색됐다.
반면 LG아트센터 바냐 삼촌의 무대는 거대한 조각 작품처럼 느껴진다. 김종석 무대 디자이너는 "특정 시대나 공간이 연상되지 않도록 무대를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LG아트센터 '바냐 삼촌' 이서진 건조한 유머·고아성도 눈길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삶의 고단함에 짓눌려 살아간다. 바냐(박이보)는 평생 시골 영지(정미소)를 지키며 죽은 누이의 남편(세레브랴코프·서병후)을 뒷바라지했다. 하지만 세레브랴코프 교수가 허명뿐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삶을 낭비했다고 느낀다. 세레브랴코프 교수는 바냐의 누이와 사별한 뒤 젊은 엘레나(오영란)와 재혼했다. 하지만 너무 늙고 병들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엘레나는 젊고 아름답지만 늙고 병든 남편 때문에 꿈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 세레브랴코프 교수의 딸 소냐(서은희)는 아버지의 주치의인 아스트로프(안해일)를 사랑하지만 외모에 자신이 없어 그 마음을 전하지 못한다. 아스트로프는 시골 의사로 열심히 살았지만, 정작 중요한 일(숲 가꾸기)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다.
이 가운데 소냐는 가장 어리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어른스러운 인물이다. 사랑하는 아스트로프 앞에서는 영락없는 소녀의 모습을 보이지만, 자기 연민에 빠진 아버지 세레브랴코프와 술에 기대 살아가는 바냐에게는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 특히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독백에서는 누구보다 깊고 진중한 면모를 드러난다.
바냐 삼촌의 손상규 연출과 반야 아재의 조광화 연출 모두 소냐 역을 맡은 고아성과 심은경에게 활기찬 소냐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주문했다. 소냐의 어른스러운 면모가 부각될 경우 자칫 극이 지나치게 어둡고 무겁게 보일 수 있음을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두 공연 모두 원작보다 밝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경쾌함은 바냐 삼촌에서 한층 두드러진다. 바냐 역을 맡은 이서진이 극의 경쾌한 분위기를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바냐 삼촌을 통해 처음 연극 무대에 도전한 그는 그동안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자신의 평소 모습을 바냐라는 인물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이서진은 "손상규 연출이 평소 말투가 너무 좋다며 그대로 유지하길 원했다"고 말했다.
바냐는 냉소적인 인물이다. "날씨가 참 좋다"는 엘레나의 말에 "목매달아 죽기 딱 좋은 날씨"라고 응수하는 대사에서 바냐의 냉소적인 면모가 잘 드러난다. 평소 예능을 통해 만사 귀찮아하면서도 툭툭 내뱉는 듯한 농담으로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이서진의 평소 모습은 냉소적인 바냐의 모습과 묘하게 잘 어울린다.
최승연 공연 평론가는 "LG아트센터의 바냐 삼촌은 바냐를 연기하는 이서진이라는 '배우의 얼굴과 본연의 언어'에 주목했고, 국립극단의 반야 아재는 1930년대 한국의 시골 정미소를 배경으로 번안돼 친숙한 시대와 공간 안에 존재하는 인물을 친숙하게 다뤘다"며 "두 공연 모두 동시대 관객들이 체호프를 비교적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문턱을 낮췄다는 공통점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국립극단 '반야 아재' 한국식 각색…조성하 짙은 상실감과 심은경 열연
조성하의 박이보는 냉소적인 면모를 유지하면서도 이서진의 바냐보다 한층 짙은 비애를 품은 인물로 다가온다. 특히 2막에서는 죽은 누이를 그리워하는 감정을 보다 직설적으로 드러내며 인물의 상실감을 극대화한다.
사실적으로 구현한 국립극단의 무대는 2막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원작에서 2막의 배경은 비 내리는 깊은 밤이다. 국립극단 무대에서는 2막 내내 비가 쏟아지고, 빗줄기는 굵어졌다 가늘어지기를 반복한다. 끊임없이 내리는 비는 웃고 있으면서도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인물들의 삶을 은유하는 듯하다. 실제로 2막에서는 박이보와 서은희, 오영란이 차례로 눈물을 흘리며 삶의 고단함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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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에서 서은희와 오영란이 함께 물장난을 치며 웃는 2막 마지막 장면 역시 인상적이다. 쏟아진 비로 물이 불어난 연못 속에서 두 사람이 잠시 환하게 웃는 모습은, 삶의 슬픔과 눈물을 잠시라도 털어내려는 몸짓처럼 읽힌다. 또한 1~3막 동안 연못과 누마루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무대가 4막에서 거대한 기계로 가득한 정미소 내부로 바뀌는 무대는 압도적인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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