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소 연료 넣고 도주 '가스 앤 런'
필리핀,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 선포
산유국 印尼 전략비축유 22일 수준
에너지 안보 시장 자율에 맡긴 결과
요즘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국가들에서 부쩍 자신감을 잃은 듯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가속화하는 석유 위기, 즉 에너지 불안 때문이다. 아세안이 석유 문제로 흔들린다는 것은 어딘가 낯설다. 보통 동남아시아는 자원부국의 이미지가 있었고, 인도네시아 같은 국가는 한때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으로 활동하며 지금도 중동 산유국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예상보다 훨씬 취약했다. 필리핀·라오스·미얀마 같은 나라들은 이웃국의 석유 수출 통제 조치에 주유소마다 수백 미터씩 줄을 서는 '에너지 뱅크런'을 겪고 있다, 상대적으로 사정이 낫다는 태국·말레이시아조차 민생과 산업이 동시에 흔들릴 정도의 압박을 받고 있다. 그동안 '아시아의 새로운 성장 엔진'으로 불려온 아세안의 가장 취약한 아킬레스건이 이번 위기를 통해 드러난 셈이다.
가장 큰 심각성을 보여준 장면은 필리핀 마닐라에서 이어지고 있다. 5월 들어 필리핀 경찰청은 전국 주유소에서 연료를 넣고 도주하는 이른바 '가스 앤 런(gas-and-run)' 사건이 급증하자 특별 경계령을 발령했다. 마닐라와 세부의 대형 쇼핑몰들은 냉방 전력 절감을 위해 영업시간 단축을 검토했고, 일부 항공사들은 항공유 확보 부담으로 지방 노선 감편에 들어갔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고성장 소비시장'으로 불리던 필리핀이 순식간에 연료 부족과 전력 절약, 생활 치안 불안에 흔들리는 모습이다.
삼중고에 빠진 필리핀
호르무즈 위기가 시작되자마자 필리핀은 흔들렸다. 3월24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국가 석유 비축량이 45일분 아래로 떨어지자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서민의 발인 대중교통 '지프니' 운전사들은 ℓ당 100페소를 돌파한 기름값을 감당하지 못해 운행을 중단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공공기관들은 전력을 아끼기 위해 주 4일 근무제와 재택근무를 강제 도입했다.
필리핀이 유독 치명상을 입은 이유는 세 가지 구조적 한계가 맞물렸기 때문이다. 원유 수입의 98%를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UAE) 등 중동에 의존하는 데다, 7000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 국가라는 특성은 해상 보급로가 막히면 외곽 섬들의 에너지 공급망이 도미노처럼 끊어지는 지리적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1998년 석유자유화법은 석유 수입과 유통을 민간 자율에 완전히 맡겨 주유소 가격이 국제 유가와 100% 연동되도록 만들었다. 정부가 가격을 통제할 법적 권한이 없었다. 호르무즈 해협의 위기는 서민들의 유가 폭등으로 여과 없이 직격했다. 여기에 에너지 위기로 필리핀 페소화 가치가 폭락하자, 석유와 천연가스를 달러로 사야 하는 민간 발전사들의 단가가 수직 상승했다. 필리핀 최대 전력회사 메랄코의 주택용 전기요금은 4월에만 kWh당 14.35페소로 치솟았다. 4~5월 폭염이라는 계절적 수요 증가와 맞물리며, 서민들은 기름값 폭등에 이어 '전기세 폭탄'에 직면했다.
이웃 국가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산유국 인도네시아는 고작 22일 정도의 전략 비축유로 최악의 석유 위기에 직면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원유를 정제할 정유 공장이 없거나 극히 미비해 태국과 베트남 등 주변국이 자국 물량 확보를 위해 석유 수출을 제한하자 물류 트럭과 구급차가 멈춰 서는 사회적 마비 상태를 경험하고 있다. 미얀마는 쿠데타 이후 외환보유고 바닥으로 폭등한 국제 유가 대금을 달러로 결제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그나마 베트남 상황이 나은 편이지만, 국가총동원 체제로 버티고 있다.
동남아 주요국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호르무즈 위기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다. 각국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며 민심을 달래려 했으나, 이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오히려 국가 재정 건전성을 위협하는 재정 스태그플레이션 위험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다.
체급이 다른 한·일 모델
아세안의 패닉은 동북아 에너지 강국인 한국, 일본과 비교했을 때 더욱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동남아 국가들의 20~45일 치 비축량은 국가 안보용과는 거리가 먼 정유사들이 유통을 위해 쥐고 있는 '상업용 재고'다. 공급이 끊기면 당장 한 달 뒤 고갈된다는 뜻이다. 실상은 위기가 터지면 거의 모든 경제주체가 사재기에 나서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셈이다.
반면 대한민국은 울산, 거제, 여수 등 전국 9개 기지의 거대한 지하 암반 동굴에 약 2억배럴 이상의 원유와 제품유를 비축하고 있다. 이는 중동에서 단 한 방울의 석유가 오지 않더라도 국내 산업과 차량을 평소와 다름없이 200일 이상 돌릴 수 있는 규모다. 실제로 한국은 지난 3월 글로벌 공조를 위해 2246만배럴의 비축유를 시장에 방출하는 여유를 보였다. 한국이 방출한 이 한 번의 물량이 필리핀 국가 전체 비축량과 맞먹는다. 1970년대 오일쇼크로 국가가 마비될 뻔한 트라우마를 겪은 후 천문학적인 재정을 투입해 방어벽을 친 결과다. 이번 위기 속에서 일본이 산유국도 아니면서 필리핀에 경유 14만2000배럴을 긴급 조달하며 '구조선'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바로 이 든든한 인프라에 있었다.
동남아 국가들이 이 모델을 몰라서 안 한 것은 아닌 듯 보인다. 전략 비축기지를 짓는 데는 수조 원이 들고, 기름을 채워 땅속에 묻어두는 순간 '잠기는 돈'이 된다. 재정 적자와 당장의 인프라 건설이 급한 개발도상국에 에너지 안보는 늘 '나중에 고민할 과제'로 치부됐다. 석유비축 능력을 확충하고 정유 인프라를 늘려야 했지만, 과거에 그랬듯 아세안은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지막 경고장
5월 말 현재 필리핀은 러시아산 원유를 5년 만에 급히 도입하고 일본·말레이시아 등으로부터 우회 공급망을 확보하면서 최악의 패닉에서 다소 진정됐다. 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일 뿐이다. 호르무즈 해협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해소되지 않는 한 불씨는 그대로 살아 있다.
현재의 잔인한 경험은 앞으로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비견될지 모른다. 필리핀 의회는 서둘러 '국가 전략 석유 비축 시스템(PSPR) 법안'을 발의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블록 차원의 에너지 협력 부재는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사치"라며 역내 공동 비축망 구축을 강력히 촉구했다. 심지어 영토 분쟁 중이던 중국과 남중국해 유전 공동 개발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리는 실리적 변화까지 보이고 있다.
아세안은 이제 당장의 재정 부담을 핑계로 에너지 안보를 시장의 자율에만 맡겨두던 방종의 시대를 끝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국과 일본을 벤치마킹해 분산형 국영 비축 기지를 건설하고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추는 에너지 전환을 가속화해 나간다고는 하지만, 그만한 여유가 있는지 미지수다.
호르무즈 쇼크는 아세안에 던져진 마지막 경고장이다. 이 교훈을 뼈저리게 새기지 않는다면 다음 지정학적 폭풍이 불어올 때 동남아시아의 경제 기적은 신기루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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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재 아시아비전포럼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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