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프롤리히 '이것은 왜 오렌지주스인가'
식품 혐오와 열광 사이, 우리가 라벨을 읽는 법
영양성분표 뒤에 숨은 기업·정부·소비자의 힘겨루기
마트 진열대 앞에서 소비자는 점점 검사관처럼 선다. '제로슈거', '무가당', '비알코올', '오렌지 100%'. 문구는 짧고 숫자는 단정하다. 문제는 그 단정함이 곧 투명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올해부터 무당·무가당 표시 제품에 감미료 함유 여부와 열량 정보를 더 명확히 표시하도록 제도를 손봤다. 한국소비자원 조사에서도 제로슈거 소주의 열량이 일반 소주보다 크게 낮을 것이라고 생각한 소비자가 적지 않았고, 비알코올과 무알코올의 차이 역시 많은 이들이 혼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라벨은 분명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 정보가 언제나 소비자가 기대한 의미 그대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자크 프롤리히의 '이것은 왜 오렌지주스인가'는 바로 그 미끄러운 틈을 파고드는 책이다. 저자는 우리가 손에 쥔 포장식품의 작은 표시면을 단순한 안내문이 아니라 권력이 압축된 결과물로 읽어낸다. 영양성분표는 과학의 언어처럼 보인다. 열량, 당류, 나트륨, 단백질, 함량, 비율. 숫자는 감정을 지운 듯 보이고, 그래서 더욱 쉽게 신뢰된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는 핵심은 오히려 반대다. 숫자는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지를 둘러싼 오랜 논쟁 끝에 선택된 결과라는 것이다.
책의 무대는 미국 식품 규제의 역사다. 불량식품과 유해물질을 가려내던 시대를 지나, 식품의 '동일성'을 표준으로 규정하던 시기를 거쳐, 이제는 라벨을 통해 정보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규제의 중심이 이동해 왔다. 처음 국가가 하려 했던 일은 식품의 본질을 정의하는 것이었다. 무엇이 잼이고, 무엇이 주스이며, 무엇이 빵인가를 가르는 일 말이다. 시간이 흐르며 규제는 식품 자체보다 식품에 붙는 말과 숫자를 관리하는 쪽으로 옮겨갔다. 음식의 정의는 맛과 물성에서 성분표와 위험표시로 이동했다.
이 변화는 언뜻 소비자의 승리처럼 보인다. 더 많이 알수록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프롤리히가 보여주는 풍경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책임 역시 소비자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국가는 표시 기준을 만들고, 기업은 그 안에서 가장 유리한 언어를 선택한다. 소비자는 그 결과물을 읽고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읽지 못하면 게으른 소비자가 되고, 읽고도 오해하면 부주의한 소비자가 된다. 라벨은 친절한 설명서이면서 동시에 책임을 소비자에게 이전하는 장치가 된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식품 라벨 논쟁을 단순히 '기업의 꼼수'나 '정부의 무능'으로 환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훨씬 더 불편한 구조를 들여다본다. 현대인은 식품을 점점 덜 만들고, 대신 더 많이 읽는다. 직접 재배하고 조리하고 맛보는 시간은 줄었지만, 건강 정보와 식단 콘텐츠, 성분표를 소비하는 시간은 오히려 늘었다. 음식은 입보다 눈으로 먼저 들어온다. 그리고 그 눈은 이미 훈련돼 있다. 낮은 숫자, 깨끗한 단어, 자연을 닮은 색, 짧은 성분표에 안심하도록 말이다.
그래서 책 제목 속 '오렌지주스'는 하나의 사례이면서 동시에 은유다. '오렌지 100%'라는 문구는 오렌지만으로 이뤄진 세계를 약속하는 듯 보인다. 실제 그 사이에는 농축과 환원, 정제수와 향료, 표시 기준과 소비자 기대가 복잡하게 끼어든다. 법적으로는 틀리지 않은 말이 생활 감각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이다. 프롤리히가 던지는 질문도 여기에 있다. 진실은 거짓의 반대편에만 존재하는가. 혹은 합법적이고 정확한 정보 속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길을 잃을 수 있는가.
책은 식품 혐오를 부추기지 않는다. "다섯 가지 이상의 성분이 들어간 것은 먹지 말라"는 식의 낭만적 순수주의에 머물지도 않는다. 오히려 왜 그런 순수주의가 매력적으로 들리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사람들은 지나치게 복잡해진 식품 체계 앞에서 피로를 느낀다. 그래서 짧고 단순한 규칙을 원한다. 제로, 무첨가, 자연, 유기농, 100%. 혐오와 열광은 서로 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복잡한 세계를 견디기 어려울 때 나타나는 비슷한 반응이다.
결국 이 책은 라벨 읽는 법을 알려주는 실용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라벨을 믿지 말라고 말하는 음모론도 아니다. 오히려 라벨을 둘러싼 세계를 다시 보게 만드는 역사서에 가깝다. 식품 정보는 우리를 더 자유롭게 만들 수도 있지만, 동시에 더 부지런한 소비자로 묶어둘 수도 있다. 무엇을 먹을지 고르는 일은 어느새 무엇을 믿을지 선택하는 일이 됐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마트 진열대는 이전과 조금 다르게 보인다. 포장지의 작은 숫자들은 더 이상 조용하지 않다. 그 숫자들은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다만 우리는 그 말을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믿어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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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오렌지주스인가 | 자크 프롤리히 지음·김병순 옮김 | 따비 | 5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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