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의 고장 안동, 관광상품이 되기 전 물어야 할 것

불꽃은 위에서 아래로 흘렀다. 낙동강 밤하늘에 걸린 붉은 선들이 강물 위로 떨어졌다가 이내 사라졌다. 지난 19일 경북 안동 하회마을. 한국 대통령과 일본 총리는 선유줄불놀이를 함께 관람했다. 과거사 문제로 한국 여론과 민감하게 맞닿아 있는 다카이치 총리는 "봄밤의 서정적인 분위기와 불꽃의 조화가 환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미소로 화답했다.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19일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서 선유줄불놀이를 보고 있다. 청와대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19일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서 선유줄불놀이를 보고 있다.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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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밤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때로 가장 많은 것을 가린다. 선유줄불놀이는 하회마을의 강과 절벽, 배와 시, 불꽃이 어우러진 선비들의 풍류놀이다. 기록상 유래는 1562년 서애 류성룡의 부친 류중영이 하회마을 앞 낙동강에서 벌인 뱃놀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청년 류성룡이 소동파의 적벽 유람을 떠올리며 시를 읊었다는 강가도 바로 이곳이다.


그 강가의 이름은 훗날 전쟁의 기록과 이어진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의 한복판에서 국정을 책임졌고, 전쟁이 끝난 뒤 '징비록(懲毖錄)'을 남겼다. '징비'란 '지난날의 잘못을 경계해 후환을 막는다(予其懲而毖後患)'는 뜻이다.

불꽃 앞에서 이 문장은 낡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전통문화는 시대에 따라 얼굴을 바꾼다. 외교의 무대가 되기도 하고, 관광상품이 되기도 한다. 어떤 전통은 소비되기 전에 먼저 설명돼야 한다. 어디서 시작됐고, 무엇을 지나왔으며, 무엇을 잊지 않기 위해 남아 있는지 말이다.


정상외교에서 장소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말해지지 않은 역사를 대신 전하는 장치다. 2016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히로시마를 찾았고, 같은 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진주만을 방문했다. 1984년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헬무트 콜 서독 총리가 손을 맞잡은 곳 역시 베르됭 두오몽 납골당 앞이었다.

안동은 그들과 다르다. 히로시마도, 진주만도, 베르됭도 아니다. 전쟁과 죽음이 직접 새겨진 장소는 아니다. 하회마을은 풍류의 공간이고, 선유줄불놀이는 애도의 의식이 아니라 즐김의 문화다. 그러나 장소의 힘은 사건이 벌어진 자리에서만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장소는 그곳에 남겨진 텍스트 때문에 무거워진다. 안동에는 '징비록'이 있다.


그래서 이 장면은 더욱 은근하다. 전란의 기억을 품은 나라가, 그 기억과 맞닿아 있는 풍류의 공간으로 일본 정상을 초대했다. 불꽃은 아름다웠고, 역사는 한 걸음 뒤에서 조용히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정부와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번 회담을 계기로 안동을 일본인 관광객 유치의 거점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선유줄불놀이를 포함한 방한 관광 특별상품도 일본 현지 여행사들과 협업해 출시할 계획이다. 함안 낙화놀이와 진주 남강유등축제를 묶은 야간 관광 코스도 거론된다. 안동을 일본 관광객에게 보여주는 일은 필요하다. 교류 역시 이어져야 한다. 문제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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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의 불꽃은 단지 사진이 잘 나오는 밤 풍경만이 아니다. 그 아래에는 강이 있고, 문중이 있고, 시가 있으며, 전쟁을 통과한 재상의 기록이 있다. 관광상품이 된다는 것은 결국 이 가운데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낼지 결정하는 일이다. 일본어 해설 한 줄, 관람 동선, 안내문 표현, 고택 숙박과 종가음식을 연결하는 방식 안에도 선택은 숨어 있다. 기억을 덜어낸 아름다움은 쉽게 소비된다. 일본 관광객은 안동의 불꽃을 보러 올 것이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그 불꽃 뒤에 놓인 문장이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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