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양적 확대보다는 장기적 성장 봐야
연구원 경력 안전망 구축 나서야 할 때

AI 확산으로 연구 생태계 재편되더라도
연구원 대체하기엔 한계 뚜렷

편집자주과학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말은 과장처럼 들릴 수 있다. 실제로 이공계 대학원생 수와 연구개발(R&D) 투자는 수치상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구 현장에서는 대학원 미충원, 길어지는 박사후연구원(포닥) 생활, 정적만 흐르는 지방 연구실이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아시아경제는 이번 연재를 통해 '과학자가 왜 사라지는가'라는 질문을 따라가 봤다. 과학자가 오래 남아 연구를 이어갈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려면 정책과 현장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해법을 찾아봤다.

"지금 한국 과학기술계의 문제는 인력 부족이 아닙니다. 사람은 길러냈지만, 연구자가 오래 남아 성장할 구조는 만들지 못했습니다."


박기범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선임연구위원(사진)은 지난 20일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이공계 위기의 본질을 이렇게 진단했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은 과학기술 인재를 꾸준히 늘려왔지만 정작 그 인재를 흡수하고 성장시킬 연구 생태계와 노동시장은 충분히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는 양적 확대 정책에서 벗어나 연구자가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구조로 정책 방향 자체를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기범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선임연구위원이 지난 22일 아시아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STEPI 제공

박기범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선임연구위원이 지난 22일 아시아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STEPI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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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계 인력 부족 아닌 연구 일자리 부족 문제"

박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국회·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한국과학기술한림원 공동 포럼에서도 대학원 정원 확대로 초점 맞춰진 인재 양성 정책이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는 점을 꼬집었다. 지금은 인재 부족이 아니라 공급과 수요의 미스매치가 핵심 문제라는 판단이다. 그는 "한국은 지난 30년간 이공계 인력이 양적으로 부족했던 적이 사실상 없었다"며 "이제는 인력 확대보다 질 좋은 연구개발(R&D) 일자리와 장기 경력 구조를 만드는 데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1991~1995년에는 R&D 인력을 필요로 하는 일자리 증가 규모가 실제 배출된 이공계 박사의 2.6배에 달했다. 하지만 이후 공급과 수요의 곡선은 서서히 뒤집히다가 2016~2020년에는 신규 박사 인력 규모가 박사급 일자리의 2배 수준까지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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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선임연구위원은 특히 지역 연구 생태계 약화 문제를 국가 차원의 위기로 인식했다. 그는 "현재와 같은 수도권 집중 흐름이 이어질 경우 일부 지역 대학은 대학원생 확보 자체가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며 "지역 연구 생태계는 한번 단절되면 단기간 예산 투입만으로 복원하기 어렵다"고 봤다.

특히 비수도권 전체가 동시에 흔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연구 인력과 학생 유입이 특정 대학과 분야로 집중되면서 지역 내부 격차 역시 빠르게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지금까지는 연구비 확대와 대학원 정원 증가 중심 정책이 이어졌지만 앞으로는 어떤 대학과 어떤 연구 분야를 장기적으로 유지할 것인지 국가 차원의 전략적 선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단기 과제 중심 구조와 박사후연구원(Postdoctoral researcher·포닥) 장기화 문제에 대해서는 "현재 시스템은 젊은 연구자에게 불확실성을 지나치게 전가하고 있다"며 "인재일수록 오히려 연구 현장을 더 빨리 떠나는 역설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제는 논문 수와 단기 성과 중심 평가를 넘어 젊은 연구자가 장기적으로 독립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는 경력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AI는 빈 연구실을 대신할 수 있을까

적은 인력으로 더 많은 논문과 데이터를 처리해야 하는 극한의 환경에서 인공지능(AI)이 연구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생성형 AI가 논문 검색과 요약을 넘어 실험 설계와 데이터 분석, 코드 작성까지 하며 연구 전반에 빠르게 스며들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 현장에서는 "숙련된 대학원생 한 명 몫을 AI가 거뜬히 해낸다"는 말까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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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도 연구현장에서 생성형 AI를 활용해 논문 초안 작성, 실험 조건 탐색, 데이터 시각화 등을 수행하며 연구의 속도를 높이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차미영 독일 막스플랑크 보안·프라이버시 연구소(MPI-SP) 단장은 "AI는 반복적 데이터 분석이나 논문 탐색, 기초 코드 작성 같은 업무를 상당 부분 줄여줄 수 있다"며 "예전에는 대학원생이 며칠씩 매달려야 했던 작업을 이제는 AI가 몇 시간 안에 처리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1인 스타트업처럼 연구실도 소수 정예의 고효율 팀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있다"며 "AI 기술을 융합한 전에 없던 새로운 과학 직군이 대거 등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AI가 연구자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차 단장은 "연구의 전체적인 방향성과 복잡한 과정을 총괄하는 오케스트레이션이 인간의 핵심 영역이 될 것"이라며 "AI가 효율성을 높일 순 있지만 '왜 이 연구가 필요한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과 가치정의는 결국 인간의 몫으로 남을 것"이라고 했다.


박 선임연구위원 역시 "AI가 연구자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라며 "AI 시대일수록 오히려 장기적으로 축적된 경험과 문제의식을 가진 연구자의 가치가 더 중요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AI 활용으로 연구 생태계 재편 가능성은 열어놨다. 다수의 대학원생이 장시간 반복 실험을 수행하던 '인력 집약적' 방식에서 소수 핵심 연구자와 AI·자동화 시스템이 협업하는 '지능형' 구조로 연구실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재편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박기범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선임연구위원이 지난 22일 아시아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STEPI 제공

박기범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선임연구위원이 지난 22일 아시아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STEPI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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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선임연구위원은 "AI가 논문 탐색과 데이터 처리, 코드 작성 같은 반복 업무를 상당 부분 대체하면 앞으로 연구실에 필요한 인력 구조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며 "AI 시대일수록 단순 반복형 연구보다 문제를 정의하고 새로운 연구 방향을 설계할 수 있는 연구자가 더 중요해질 가능성이 크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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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과학자는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며 "이제 과학기술 인재 정책은 몇 명을 배출했는가가 아니라 한 명의 연구자가 얼마나 오래 성장하고 다음 세대를 길러낼 수 있는가를 중심으로 다시 설계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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