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의 딸을 폐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세종과 금실이 좋았고 처신이 현명한 소헌왕후에 우호적인 의견이 우세했다. 시아버지의 서슬에, 23세 소헌왕후는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충격과 비통함을 억누르며 모진 시기를 견뎠다. 부인을 지켜보는 세종의 마음 한편에 참담함과 미안함이 뒤엉켰다.
소헌왕후는 1446년 51세에 숨을 거둔다. 세종은 슬픔 속에서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우리말 운문(韻文)을 짓고 엮어 ‘월인천강지곡’을 펴낸다. 유교를 이념으로 세워진 조선인지라 신하들의 반대가 거셌다. 그럼에도 세종이 이 책을 간행한 것은 부인의 명복을 빌고 백성들에게 친숙한 부처 이야기를 통해 한글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서문에 해당하는 부분에 담긴 ‘“세존의 말씀을 여쭙겠으니 몇 천 년 전의 말씀이시나 귀에 듣는 듯 여기시옵소서” 등 문장은 세종이 소헌왕후에게 올리는 말로 풀이된다. 한글 활용법을 널리 알린다는 취지는 한글을 크게, 한자어인 경우 한자를 작게 병기한 방식으로 표현됐다.
이 책 단어의 받침에는 당시 규정상 허용되지 않은 ㅊ, ㅌ 같은 자음이 활용됐다. 얼굴을 가리키는 낱말이 '낯'( 아래아를 ㅏ로 표기)으로 쓰였다. 당시 규범 표기는 '낫'이었다. 관련 규정은 '종성은 여덟 글자(ㄱ·ㅇ·ㄷ·ㄴ·ㅂ·ㅁ·ㅅ·ㄹ)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받침은 인쇄된 이후, 책으로 장정되기 전에 교정된 결과였다. 누군가가 '낫' 글자에 도장을 찍듯 한 획을 추가해 '낯'으로 고쳤다. 같은 방식으로 '낟'은 '낱'으로 교정했다. 단어의 어간을 나타내는 현대적인 표기법이다.
왕이 주도한 간행 작업에서 감히 누가 맞춤법 규정을 어기고 이렇게 교정했을까? 국어학자 안병희는 "세종 개인의 표기법에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고 추측했다. 이처럼 세종은 한글 표기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신하들이 '받침은 여덟 자음으로 충분하다'는 규정을 만들었지만, 그 규정을 따르지 않았다. 세종이 받침 표기에 이토록 애정을 기울인 것은 그가 훈민정음을 직접 창제했다는 방증이다.
한국 문화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날로 고조되고 있다. 그 핵심에 우리말과 한글이 있다. 우리말과 한글을 세계에 알리는 일은 세종을 중심으로 진행돼야 한다. 그 방식이 의미에서나 효과에서나 마땅하다.
희한하게도 정작 한국에 세종과 훈민정음을 틀리게 전하는 내용이 많고 버전을 달리해 거듭 대두된다. 집현전 학자 등이 세종과 함께 한글을 창제했다는 협찬설, 독자 문자 창제는 중국의 탄압을 초래할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가 극심했다는 설, 한자음을 정확히 표기하기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는 주장 등이다.
세종을 국내외에 제대로 알리는 방안 중 하나로 5월15일을 ‘세종 탄생일’로 기리자고 제안한다. 기존 ‘스승의 날’과 병행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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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우진 경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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