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스강의 진흙, 세이칸의 고압수, 거가의 침매, 노르웨이 피오르드…그리고 16조 제주 해중 부유식 터널의 미래

인류가 바다를 건너는 기술은 언제나 자연과의 처절한 싸움이었다. 거친 파도를 넘기 위해 배를 띄우는 것에서 시작해 깊은 해협에 강철 다리를 세우고, 마침내 바다 밑 단단한 암반을 뚫어 길을 내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러나 인간의 상상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제 다음 단계는 바다 밑바닥을 파는 대신, 바다 중간 수심에 길을 띄우는 해중 부유식 터널(Submerged Floating Tunnel·SFT) 이다.

[사이언스 스코프] 바다를 뚫던 인류, 이제 바다 속에 '길'을 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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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미래 상상처럼 들리지만, 이 기술은 하루아침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1843년 런던 템스강의 진흙 속에서 시작된 한 아이디어가 200년 동안 축적되며 지금 제주 바다 아래를 향하고 있다.

런던 템스강, 무너지는 진흙 속에서 탄생한 '방패'


1843년 영국 런던. 당시 템스강 아래로 터널을 뚫는다는 것은 무모함을 넘어선 광기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강바닥은 단단한 암반이 아니라 물을 가득 머금은 진흙과 모래층이었다. 조금만 파내도 위에서 강물이 쏟아져 들어와 작업장은 순식간에 수중 무덤으로 변했다.


실제로 공사 중 강물이 여러 차례 터져 들어와 작업 구간 전체가 침수됐고, 인부들이 급히 빠져나오는 사고가 반복됐다.

이 난제를 해결한 구원투수는 엔지니어 마크 브루넬(Marc Brunel)이다. 그는 '철제 방패(Shield)'를 고안해 현장에 적용했다. 쉴드는 오늘날 TBM처럼 스스로 뚫고 나가는 기계가 아니라, 거대한 철제 벽을 여러 개의 작은 작업칸으로 나눈 구조물이었다. 각 칸마다 노동자 한 명씩 들어가 삽으로 흙을 조금씩 퍼내면, 방패 전체가 유압잭과 나사식 장치로 몇 센티미터씩 앞으로 밀려 나갔다.

마크 브루넬이 고안한 템스 터널의 '실드(Shield)' 공법 개념도. 여러 작업칸에서 동시에 흙을 파고 뒤에서 벽체를 쌓으며 전진하는 방식이다. 브루넬 박물관(Brunel Museum) 제공

마크 브루넬이 고안한 템스 터널의 '실드(Shield)' 공법 개념도. 여러 작업칸에서 동시에 흙을 파고 뒤에서 벽체를 쌓으며 전진하는 방식이다. 브루넬 박물관(Brunel Museu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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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직후 바로 뒤에서는 다른 인부들이 벽돌을 둥글게 쌓아 터널의 영구 벽체를 만들었다. 다시 말해 앞에서는 흙을 파고, 뒤에서는 동시에 벽을 세우며, 전체 구조물을 조금씩 밀어 전진하는 방식이었다.


핵심은 속도였다. 템스강의 진흙층은 스스로 서 있지 못했기 때문에, 흙을 파는 속도와 벽을 세우는 속도가 거의 동시에 맞아떨어져야만 붕괴를 막을 수 있었다. 템스 터널은 단순히 길을 낸 것이 아니라, "무너지는 연약 지반을 어떻게 버틸 것인가"라는 인류의 첫 번째 기술적 해답이었다.


세이칸 터널, 바닷물과 화산지반을 뚫은 일본의 집념


기술의 다음 도전은 일본이었다. 혼슈와 홋카이도를 잇는 세이칸 터널(Seikan Tunnel) 은 길이 53.85㎞, 이 중 23.3㎞가 해저 구간인 세계적 해저 철도터널이다.


일본 기술자들이 가장 힘들었던 건 길이보다 고압 해수와 화산성 암반이었다. 암반에 균열이 조금만 있어도 바닷물이 엄청난 압력으로 분출됐고, 실제로 공사 중 대규모 침수와 붕락 사고가 반복됐다.

세이칸 터널 개요도. 세이칸 터널 구조 개요도. 본선보다 작은 선행 갱도로 물길을 먼저 찾아 배수·차단한 뒤 본 터널을 굴착하는 방식이다. JR 홋카이도 제공

세이칸 터널 개요도. 세이칸 터널 구조 개요도. 본선보다 작은 선행 갱도로 물길을 먼저 찾아 배수·차단한 뒤 본 터널을 굴착하는 방식이다. JR 홋카이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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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선택한 해법은 본선을 바로 뚫지 않는 것이었다. 먼저 더 작은 탐사용 선행 갱도를 먼저 뚫어 어디에서 물이 새고 암반이 약한지부터 파악했다. 이 선행 갱도는 단순 탐사 통로가 아니라, 거대한 배수관이자 위험 감지 센서 역할을 했다.


물이 새어 들어오는 구간이 나오면 시멘트 밀크를 틈새에 주입해 물길을 먼저 막고, 강관과 록볼트로 약한 암반을 보강했다. 쉽게 말하면 작은 혈관을 먼저 찾아 지혈한 뒤 본 수술에 들어간 것이다.


이 방식 덕분에 일본은 24년에 걸친 장기 공사 끝에 세계 최장급 해저터널을 완성했다. 세이칸은 바닷속 압력과 지질 불확실성을 '선행 갱도'라는 아이디어로 돌파한 상징적 사례다.


한국의 현재: 거가대교 침매터널, 바다 밑에 '가라앉힌 길'


한국 독자에게 가장 직관적인 연결고리는 침매터널인 거가대교다. 부산과 거제를 잇는 거가대교는 국내 최초 침매터널로, 육상 도크에서 길이 수백m짜리 거대한 콘크리트 함체를 제작한 뒤 바다 위에 띄워 현장으로 예인했다. 이후 미리 준설한 해저 도랑에 하나씩 가라앉혀 연결하는 방식으로 건설됐다.


공사에서 가장 어려운 공정은 함체를 바닷속 도랑에 정확히 '끼워 맞추는' 것이었다. 조류가 조금만 강해도 구조물이 수㎝씩 밀려나 접합이 실패할 수 있었다.

육상 도크에서 제작된 길이 약 180m 규모의 침매터널 함체. 이후 해상으로 이동해 해저에 가라앉혀 연결된다. 대우건설 제공

육상 도크에서 제작된 길이 약 180m 규모의 침매터널 함체. 이후 해상으로 이동해 해저에 가라앉혀 연결된다. 대우건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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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해결하기 위해 GPS 기반 위치추적, 수중 음향 측위 시스템, 레이저 정렬 장비가 동시에 동원됐다. 해저에는 미리 가이드 프레임을 설치하고, 함체에는 임시 부력 탱크를 달아 가라앉는 속도를 미세하게 조절했다.


마지막 접합 순간에는 내부 압력을 조정해 함체끼리 고무 개스킷을 밀착시키고, 내부의 물을 빼내며 진공에 가까운 상태로 서로 빨아들이듯 결합했다. 즉 거가 침매터널은 단순히 '바다에 가라앉힌 길'이 아니라, 위치 정렬·부력 제어·압력 접합을 총동원한 해양 정밀 수술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가 바로 바다 밑에 가라앉히는 것이 아니라 바닷속에 띄우는 기술, 즉 해중 부유식 터널(Submerged Floating Tunnel·SFT)이다.


노르웨이 피오르드, 바다 밑 대신 바닷속을 택하다

노르웨이 피오르드 구간에 검토 중인 해중 부유식 터널(SFT) 개념도. 수면 아래 부유식 터널 내부로 차량이 이동하고 상부 해역에서는 선박이 통행하는 구조다. 노르웨이 도로국(NPRA) 제공

노르웨이 피오르드 구간에 검토 중인 해중 부유식 터널(SFT) 개념도. 수면 아래 부유식 터널 내부로 차량이 이동하고 상부 해역에서는 선박이 통행하는 구조다. 노르웨이 도로국(NPRA)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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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는 여기서 발상을 완전히 바꿨다. 서부 피오르드의 뵈르나피오르덴과 로브데피오르드는 수심이 1000m를 넘는다. 이런 곳은 세이칸처럼 해저 굴착을 하려면 너무 깊고, 교량은 기둥 사이를 버텨야 하는 길이가 지나치게 길어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노르웨이 도로국은 페리 없이 전 구간을 연결하는 E39 프로젝트에서 SFT를 본격 검토 중이다. 핵심은 바다 바닥까지 내려가지 않고 수면 아래 20~30m 깊이에 터널을 띄우는 것이다.

해중 부유식 터널(SFT)의 대표 구조 개념도. 해저 케이블로 고정하는 방식(a)과 수면 위 폰툰 구조물로 부력을 제어하는 방식(b)을 보여준다. MDPI 제공

해중 부유식 터널(SFT)의 대표 구조 개념도. 해저 케이블로 고정하는 방식(a)과 수면 위 폰툰 구조물로 부력을 제어하는 방식(b)을 보여준다. MDPI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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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원리는 의외로 직관적이다. 터널 내부는 차량과 열차가 다닐 수 있도록 비어 있지만, 외벽은 두꺼운 콘크리트와 강재로 만들어 전체적으로는 물보다 약간 가볍게 설계된다. 이렇게 하면 구조물은 자연스럽게 위로 뜨려는 힘, 즉 부력을 갖는다.


이 힘을 해저 바닥에 박은 앵커 케이블이 아래로 잡아당기며 균형을 맞춘다. 파도가 위에서 흔들어도 케이블 장력이 즉각 반응해 진폭을 줄이는 원리다. 일부 설계는 수면 위 폰툰까지 연결해 상하 흔들림을 더 줄인다. 쉽게 말하면 위로 뜨려는 힘과 아래로 당기는 케이블의 줄다리기 균형으로 바닷속 고속도로를 고정하는 셈이다.


곽종원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선임위원은 "토목공사에서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거의 없다"며 "SFT 역시 개념과 요소기술은 이미 구현 가능한 수준에 와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문제는 기술 자체보다 경제성과 안전성,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수용성'"이라고 강조했다.

해중 부유 터널 구조 및 시공 방법 등록특허를 보유한 '푸른들'이 제시한 다층 구조의 해중 터널 개요도. 도로와 철도, 보행로까지 갖추고 일부 구간은 관광을 위한 해중, 해상 전망대도 설치돼 있다. 푸른들 제공

해중 부유 터널 구조 및 시공 방법 등록특허를 보유한 '푸른들'이 제시한 다층 구조의 해중 터널 개요도. 도로와 철도, 보행로까지 갖추고 일부 구간은 관광을 위한 해중, 해상 전망대도 설치돼 있다. 푸른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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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중 부유식 터널, 16.8조의 도전과 멈춘 시간


이제 이 기술은 한국의 현실 과제로 이어진다. 목포~제주 연결 J-노선은 총연장 167㎞, 해저 구간만 약 73㎞에 달한다. 사업비는 약 16조8000억원으로 추산된다.


사실 이 논의는 2010년대 초반 가장 뜨거웠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과 일부 토목·해양 인프라 연구진이 기본설계 수준의 연구를 진행했고, 당시만 해도 해중 부유식 터널이 제주를 잇는 미래 교통망으로 크게 주목받았다.


그러나 이후 논의는 사실상 멈췄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성(B/C(Benefit/Cost ratio)·비용 대비 편익) 확보의 어려움이었다. 항공 수요가 이미 충분한 상황에서 막대한 초기 투자비를 회수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컸고, 추자도 경유 여부와 물류 수요 전망도 변수였다. 여기에 국가 SOC 우선순위 변화와 예비타당성조사 단계 진입 실패가 겹치며 후속 논의가 끊겼다.

[사이언스 스코프] 바다를 뚫던 인류, 이제 바다 속에 '길'을 띄우다 원본보기 아이콘

곽 선임위원은 "비용은 기술 발전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지만, 안전에 대한 심리적 불안과 사회적 합의가 더 큰 장벽"이라며 "제주 연육 역시 기술 문제가 아니라 정책적 판단의 영역에 가깝다"고 말했다.


서승일 한국철도기술연구원 수석연구원은 기술적 가능성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전망을 내놨다. 그는 "해중 부유식 터널은 직선에 가까운 노선 확보가 가능해 공사 기간 단축과 경제성 측면에서 장점이 있다"며 "해저터널과 침매터널, 부유식 터널을 혼합하면 장거리 해저 노선의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최근에는 기후위기 시대 항공 대체 교통망, 제주 물류 안정성, 국가 균형발전 논의가 다시 커지면서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기존 굴착식보다 오히려 SFT가 현실적일 수 있다"는 재검토 분위기도 감지된다.


서 수석연구원은 "제주 해저 연결은 지역 간 입장 차이와 기술 선호 차이가 존재한다"며 "정치적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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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를 보며 달린다"…교통에서 관광 플랫폼으로


SFT가 단순한 토목 기술을 넘어서는 이유는 '경험의 변화'에 있다. 기존 해저터널이 어두운 콘크리트 벽만 보이는 폐쇄 공간이었다면, SFT는 관측창이나 투명 강화 소재를 적용해 바닷속 생태를 직접 보는 공간으로 확장될 수 있다.


해중 부유 터널 구조 및 시공 방법 등록특허를 보유한 강성수 씨는 "해중터널은 이제 단순한 이동 통로를 넘어 수중 관광, 해양 생태 관측, 조류 발전과 해상풍력을 결합한 미래형 복합 플랫폼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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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 런던의 노동자들이 템스강 진흙 속에서 벽돌을 쌓으며 만들었던 길은, 이제 제주 바다 아래를 물고기 떼와 함께 달리는 인류의 새로운 꿈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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