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경의 창]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된 사람
AD
원본보기 아이콘

제주올레길을 만든 서명숙은 기자 시절 '3보 이상은 승차'가 일상이었다. 지하철역에서 회사 앞까지 200m의 짧은 거리도 택시를 타곤 했다. 아마 저승사자처럼 다가오는 기사 마감에 걷는 시간이 아까웠을 것이다. 맹렬 '정치부 여기자 1세대'로 여성 최초 시사주간지 정치부장,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기자로서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몸은 무너지고, 마음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메말랐다. 이대로는 죽을 것 같은 '번아웃'이 찾아왔다.


2006년 9월,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산티아고 순례길'로 향했다. 걷기가 힘들었지만 살기 위해 걸었다. 800㎞가 넘는 길 위에서 그는 깨달았다. 사람은 길을 걸을 때 비로소 자신과 만난다는 사실을. 과로로 무너진 뒤, 산티아고에서의 시간은 멈춰 있던 삶을 다시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결심한다. "내 고향 제주에 사람을 살리는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길을 만들리라."

그는 귀국 후 사단법인 제주올레를 설립했고 2007년 9월, 제주 동쪽 끝 세계자연유산 성산을 잇는 제주올레 1코스를 열었다. 지금은 27개 코스에 437㎞의 올레길이 완성됐다. 그는 중장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직 사람의 손과 발로 시간과 정성으로 길을 냈다. 숨은 길은 찾아냈으며, 끊어진 길은 이었고 사라진 길은 되살려냈다.


제주올레길을 만든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영결식이 지난 10일 제주 서귀포시 서복공원에서  열렸다. 연합뉴스

제주올레길을 만든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영결식이 지난 10일 제주 서귀포시 서복공원에서 열렸다. 연합뉴스

원본보기 아이콘


올레길은 관광 문화를 바꿨다. 그전까지 제주 여행은 차를 타고 훌쩍 둘러보는 '뷰 포인트' 중심의 패키지 관광이었다. 그러나 올레길은 제주의 숨은 속살을 보여주었다. '걸은 만큼, 머무른 만큼 제주가 보인다'는 미션을 줬고 '제주 한 달 살기' 바람이 불었다. 제주연구원에 따르면 2025년 기준 제주올레를 한 번이라도 찾은 사람은 1300만명이 넘는다. 해마다 4500여명의 27개 코스 완주자가 탄생한다. 제주올레로 인한 생산 유발 효과는 매년 1조2000억원에 달한다.

제주올레는 전국에 걷기 열풍도 불렀다. 지방정부가 올레길을 벤치마킹하며 저마다의 길을 냈다. 동해안의 해파랑길, 강릉 바우길, DMZ 평화의 길, 동서트레일 등 100여개의 길이 탄생하며 전 국토가 '둘레길'로 연결됐다. 제주올레는 해외로도 수출됐다. 일본에 '규슈 올레'와 '미야기 올레'가 만들어졌다. 몽골에는 몽골올레가 제주올레와 정식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트레킹 코스를 만들었다. '성을 쌓는 자 망하고 길을 내는 자 흥한다'는 몽골의 오랜 격언을 제주의 후손이 가르쳐준 셈이다.


올레길(Trail)의 성과보다 중요한 건 '올레길(Way)'이 깨우쳐준 치유와 자기 자신만의 길을 가라는 가르침이다. '올레'는 제주어로 집 앞과 세상을 잇는 골목길을 뜻한다. 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나서는 문턱에서 시작된다는 의미다. 서명숙은 저서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올레여행'에서 "올레길을 걸으면서 제주의 속살을 들여다보라.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기를, 가파른 속도에서 한순간이라도 벗어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AD

번아웃에 신음하던 사람들에게 '천천히' 살자며 위로를 건네던 그가 지난 7일 먼 '하늘 올레길'로 떠났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올레길에서 행복하라"였다고 한다. 정호승 시인은 '봄길'에서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고 노래했다. 서명숙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올레길을 "힘들고 지친 당신에게 바치는 길"이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길이 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조영철 팀장 yccho21@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