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새 전 화마에 영웅 2명 떠나보낸 완도소방서
촌각 다퉈 현장 도착해보니 만취자의 허위 신고
분통 터진 주민들 "사람이 할 짓이냐" 엄벌 요구

"집에 불이 났다"는 다급한 신고에 소방차와 경찰차가 대거 출동했지만, 현장에 남은 것은 맹렬한 불길이 아닌 한 상습 주취자의 어처구니없는 허위 신고였다.


불과 닷새 전 화마(火魔) 속에서 동료 두 명을 떠나보내고, 깊은 트라우마에 빠져 있던 소방관들은, 자신들의 헌신을 조롱하는 듯한 만취자의 난동 앞에 끝내 고개를 떨궜다.

17일 화재 신고에 소방관들과 경찰이 도착한 현장엔 불길 대신 만취한 신고자만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준경 기자

17일 화재 신고에 소방관들과 경찰이 도착한 현장엔 불길 대신 만취한 신고자만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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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뚫고 달린 소방차…현장엔 '술 냄새'만 진동

17일 전남 완도소방서와 경찰 등에 따르면, 이날 오후 8시 13분께 완도군 완도읍의 한 LH 아파트에서 "집 안 문이 열리지 않고 불이 났다"는 긴박한 119 신고가 접수됐다. 자칫 대형 참사로 번질 수 있는 밀폐된 공동주택 화재. 소방 당국은 즉각 소방차와 구급차 등 5대와 경찰 순찰차 2대를 긴급 출동시켰다.

동료를 잃은 지 불과 닷새, 출동 벨 소리만 울려도 가슴이 내려앉는 잔인한 시기였지만, 대원들은 일분일초를 다투며 현장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았다. 그러나 참사를 막겠다는 일념으로 도착한 아파트 진입로 앞 풍경은 대원들의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화마의 흔적은커녕 코를 찌르는 짙은 술 냄새만이 진동했다. 무거운 방화복을 입고 장비를 챙겨 뛰어 들어가려던 대원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 건, 진입로 앞에서 비틀거리고 있던 신고자 A씨였다.

평소 상습적으로 주취 소란을 피워온 것으로 파악된 그는 만취 상태로 누군가와 태연히 휴대전화 통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현장을 살피는 대원들을 향해 미안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던 그는 급기야 휴대폰으로 지인과 통화하며 "소방차들이 너무 많이 와서 시끄러워 죽겠다"며 거친 욕설을 뱉어냈다.


긴박했던 진입로에 울려 퍼진 그의 짜증 섞인 푸념은 출동한 대원들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기에 충분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현장 출동으로 단련된 이들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허탈함을 넘어선 깊은 절망감이 현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헛걸음한 소방대원들의 뒷모습에 깊은 허탈감이 묻어나는 가운데, 경찰은 인사불성인 만취자를 귀가 조치했다. 이준경 기자

헛걸음한 소방대원들의 뒷모습에 깊은 허탈감이 묻어나는 가운데, 경찰은 인사불성인 만취자를 귀가 조치했다. 이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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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 앞 눈물 채 마르기도 전인데…공분 산 '술주정'

대원들의 깊은 상실감은 지난 12일 완도 수산물 가공공장 화재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맹렬한 불길에 뛰어들었던 동료 대원 2명이 끝내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온 비극의 충격이 휩쓸고 간 직후였다.


세 아이를 둔 평범한 가장과 결혼을 불과 5개월 앞둔 예비 신랑이었던 헌신적인 영웅들을 잃고, 영정 사진 앞에서 흘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이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소동을 지켜본 주민들 역시 끓어오르는 분통을 감추지 못했다.


소란을 듣고 밖으로 나온 한 주민은 분노를 표출했다. 그는 "두 명의 소방관이 목숨을 잃어 온 지역이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데, 아무리 만취자라지만 사람이 할 짓입니까. 저런 사람은 사회와 격리해 당장 구속하고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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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현장에서 인사불성 상태인 A씨를 일단 귀가 조처했으며, 술이 깨는 대로 그를 허위 신고 등 정확한 경위를 조사할 방침이다. 누군가의 한낱 '술주정'에 막대한 소방력이 낭비되고, 목숨을 건 숭고한 출동마저 성가신 소음으로 치부되는 씁쓸한 현실이 남은 대원들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다.


호남취재본부 이준경 기자 lejkg12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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