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금융 RM의 자부심, 실적 지표에 가려지나
생산적 금융 확대 속 '내실 있는 투자' 선행되어야

기업금융을 담당하는 RM(Relationship Manager)은 책상 위 숫자보다 공장 굴뚝의 연기와 트럭의 움직임을 더 자주 살핀다. 회사가 확장되고 낡은 설비가 교체되며, 직원이 늘고 트럭이 더 자주 드나드는 것. 이 모든 것이 회사가 성장하고 있다는 징후이기 때문이다.


기업 투자는 그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고 이들은 말한다. 기업금융은 단순한 대출 업무를 넘어 성장의 한 국면에 함께 올라타는 파트너십이다. 그래서 RM들은 자신의 업에 자부심을 느낀다. "내가 발굴한 회사가 이만큼 컸다"는 경험은 이들을 다시 치열한 현장으로 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자금이 필요한 유망 기업을 골라내는 과정은 순조롭지 않다. 업종마다 매출과 자금 수요가 몰리는 시기가 다르기에 과거 실적과 업종 사이클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 공장 가동 상황과 생산 흐름을 직접 확인하며 최적의 투자 타이밍을 맞추는 이 풍경은 사실 낯선 것이 아니다. '생산적 금융'이라는 이름이 붙기 전부터 현장에서 묵묵히 이어져 온 본질적인 업무다.


그러나 최근 이재명 정부가 생산적 금융에 강력하게 힘을 싣기 시작하면서 현장 분위기에도 차츰 변화가 일고 있다. 국내 주요 금융지주들은 올해부터 향후 5년간 500조원이 넘는 자금을 생산적 금융에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올해만 약 100조원이며, 이 가운데 60조원은 기업 대출로 채워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시중은행들은 앞다퉈 생산적 금융 관련 신규 여신에 핵심성과지표(KPI) 가점을 부여하기로 했다. 생산적 금융의 실행 속도를 높이겠다는 취지다. 이 때문에 실제 현장에서는 생산적 금융으로 분류되는 업종을 우선적으로 찾거나 해당 기업에 더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RM 개인의 영업 실적은 곧 지점의 성과가 되고, 그렇게 쌓인 숫자는 성과급으로 돌아온다. 현장의 선택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 RM의 말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같은 100억원 대출이라도 (가점 덕분에) 120억원으로 인정받는 게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구조는 자금 배분의 우선순위를 왜곡할 우려가 있다. 똑같이 자금이 절실한 기업들이라도 KPI상 유리한 업종이 먼저 선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자금의 양극화다. 정책적 혜택이 집중된 특정 업종이나 기업에만 자금이 쏠리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와중에 4개 시중은행이 올해 제시한 생산적 금융 목표치의 절반가량을 1분기 만에 달성했다는 소식은 의구심을 자아낸다. 기업금융(IB)뿐 아니라 일반 여신도 포함된 수치라지만, 30조원에 육박하는 자금을 단 3개월 만에 어디에 투입했느냐는 의문이다. 더욱이 지금은 중동 사태 등으로 대외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달한 때다. 기업들이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투자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시기다.


발굴이 어려운 환경에서 실적 압박이 가해지면 심사 기준은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기업에 자금을 밀어 넣으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고, 혁신이나 성장과는 거리가 먼 기업으로 엉뚱하게 돈이 흘러 들어갈 위험도 크다. 그렇게 실행된 대출은 당장 화려한 '실적 숫자'가 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성장의 과실이 아닌 '부실 손실'로 되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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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전문적 판단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단순한 실적 수치가 아니라 '판단의 질'이 평가받는 구조,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섬세한 인센티브 설계가 필요하다. RM들의 현장 판단이 살아 있어야만, 소중한 자본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김민영 차장 argu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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