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부의 대규모 약가 인하는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가능성과 국민 의료비 경감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 그 바탕에는 우리나라 제네릭 의약품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단순한 재정 논리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에 서 있다.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불안, 글로벌 공급망 재편, 그리고 완전히 끝나지 않은 팬데믹의 기억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위험'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몇 년 전의 경험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전 세계는 의약품과 의료물자의 심각한 공급 부족을 겪었다. 마스크와 진단키트는 물론 일부 필수의약품조차 원활하게 공급되지 못했다. 특정 국가에 집중된 생산 구조와 취약한 글로벌 공급망은 위기 상황에서 얼마나 쉽게 붕괴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평상시에는 효율적이던 글로벌 분업 체계가 위기 상황에서는 오히려 위험의 근원이 된 것이다. 이는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말한 '위험의 세계화'를 현실에서 입증한 사례였다. 위험은 국경을 넘어 확산되었고, 누구도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원료의약품의 상당 부분을 해외에 의존하는 구조 속에서 공급 불안은 언제든 현실이 될 수 있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꼭 필요한 양질의 전문의약품을 70% 이상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위기를 잘 관리해냈지만, 그 경험은 분명한 교훈을 남겼다. 의약품 공급망은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국가 안보의 문제라는 점이다.
안보 문제로 확대된 의약품 공급망
이러한 기억이 생생한 지금, 대규모 약가 인하는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한다. 비용 절감이라는 정책 목표가 장기적인 공급 안정성과 산업 경쟁력을 훼손하지는 않을 것인가. 특히 중동 지역 긴장 고조로 에너지 가격과 물류 비용이 상승하는 상황에서 기업의 수익 기반까지 약화된다면 그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더 중요한 점은 이러한 변화가 단발적 충격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위험사회에서 정책은 또 다른 위험을 낳고, 그 위험은 다시 새로운 문제를 촉발하는 연쇄 구조를 가진다. 약가 인하로 인한 수익 감소는 연구개발 투자 축소로 이어지고, 이는 혁신 신약 개발 지연과 산업 경쟁력 약화로 연결될 수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최근에 나온 맥킨지앤드컴퍼니의 '2026 아시아 제약바이오 보고서'는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진다. 보고서는 올해를 '아시아 퀀텀 점프의 해'로 규정한다. 아시아는 더 이상 추격자가 아니라 글로벌 혁신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혁신 신약 파이프라인 비중도 5년 만에 28%에서 43%로 급증했다. 그 중심에 우리나라와 중국이 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양적 확대가 아니다. 연구개발 속도, 특허, 기술 모달리티, 글로벌 라이선싱 등 모든 지표에서 아시아는 '도약'을 넘어 구조적 우위를 형성하고 있다. 지금은 위기인 동시에 기회의 시간이다. 그러나 정책과 환경이 그 기회를 제약할 위험 또한 커지고 있다.
제약산업은 투자산업…'위기 대응' 관점 필요
약가인하는 단기적으로 재정 안정이라는 명확한 목적을 가진다. 그러나 제약산업은 투자 산업이다. 매출 감소는 곧 연구개발 감소로 이어지고, 이는 미래 경쟁력의 약화로 직결된다. 더 나아가 공급망 대응 능력의 약화는 다음 위기에서 더 큰 비용을 초래할 수 있다. 지금의 정책은 단순한 재정 절감이 아니라 '위기 대응 능력'을 기준으로 재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지금의 정책은 아시아의 퀀텀 점프 흐름과 정렬되어 있는가, 아니면 충돌하고 있는가. 산업계는 지금은 제약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골든 타임이라고 강조해 왔다. 우리 제약산업이 충분히 성숙하여 신약개발의 강국으로 가기 위해서 지금은 약가인하의 시점이 아니라 퀀텀점프의 도약대를 마련해야 할 시기라고 말이다.
해법은 분명하다. 첫째, 정책은 속도보다 회복탄력성을 고려해야 한다. 이미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급격한 약가 인하보다는 단계적이고 예측 가능한 접근이 필요하다. 둘째, 공급망 안정성을 위한 전략적 투자가 병행되어야 한다. 원료의약품 국산화, 공급선 다변화, 비상 대응 체계 구축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다. 셋째, 혁신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연구개발에 대한 과감한 인센티브와 합리적 규제 완화는 강화되어야 한다. 넷째, 산업도 내부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제네릭 중심의 과잉 경쟁 구조를 넘어 공동개발, 공동생산, 플랫폼 기반 협력 모델로 전환해야 한다. 아시아의 퀀텀 점프는 '개별 기업'이 아니라 '생태계' 단위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단순한 위기의 시대가 아니라 질서가 재편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약가인하와 중동 리스크는 개별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의 신호다. 벡의 위험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능력이다.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삼전 노조보다 더 세게 불렀다" 현대차 노조 성과...
노연홍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회장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