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공감 없이 ‘에너지 태산’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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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결제한 주차비는 어떻게 하나요."


영남권 공공기관에 재직 중인 한 공무원은 '차량 2부제' 소식에 분통부터 터뜨렸다. 소속 기관이 임차 건물에 입주해 있어 한 달에 십수만 원의 주차비를 허공에 날렸다는 것이다. 자차로 20분이면 닿을 거리를 대중교통으로 1시간 넘게 돌아가며 '출근 전쟁'을 치러야 하는 이들에게 '아껴 쓰자'는 정부의 구호는 시간적·경제적인 '비용'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중동발 에너지 위기라는 파고를 넘기 위해 정부가 '차량 요일제'라는 처방을 꺼내든 지 3주일째다. 이번 위기를 두고 '제3차 오일쇼크'에 준하는 비상사태라는 진단마저 나온다. 이런 엄중한 시국에 공직사회가 먼저 에너지 절약을 위해 솔선수범하겠다는 취지야 나무랄 데 없다. 문제는 이 노력이 민심에 가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정부 추산대로라면 공공기관 차량 2부제로 거둘 수 있는 하루 최대 석유 절감량은 560배럴에서 2900배럴. 국내 일일 소비량(281만배럴)의 0.1% 수준이다.


공직사회의 솔선수범으로 민간 참여를 견인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복안이다. 하지만 공직사회 내부에서부터 '우회로'를 찾는 모습이 목격된다. 일례로 규제에 동참하기보다 사비를 들여 인근 유료 주차장을 찾는 것이다. 지난달 25일 '차량 5부제' 지침은 계도 기간도 없이 공공기관에 하달됐다. 충분한 준비와 설명 과정이 생략됐던 것이다. 현장에서 만난 공공기관 관계자는 "시행 당일 아침 전화를 받고서야 부랴부랴 단속에 나섰다"고 털어놨다. 한 공공기관에선 연차 낸 직원들에게 "아이 등·하원이나 원거리 출퇴근 등 예외 사유를 증명할 서류를 당일 제출하라"고 독촉해 원성을 사는 일도 있었다.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아껴보겠다고 진을 빼는 이 와중에도 '꼼수 출근'으로 맥을 빼는 고위직들의 목격담은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이런 상황에서 제도가 시민의 일상에 온전히 안착할 리 만무하다. 기자가 찾은 서울 영등포구 공영주차장 곳곳의 차단기 앞은 차량 5부제 시행 사실을 모르는 민간 차들로 아수라장이었다. 민간 차량과 관리인 사이의 고성이 오가고 그 뒤로 차량 행렬이 길게 늘어서는 일이 반복됐다. 인근 관할 주민센터는 '관리 인력이 없다'는 이유로 사실상 제도 홍보와 계도에 손을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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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차량 부제 실효성 논란에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구호로 갈음했다. 정부의 바람대로 민간의 자발적 동참만 끌어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러려면 일상에 가닿는 정교한 유인책이 전제돼야 한다. 운행 날짜를 강제하기 전에 충분한 안내가 필요하다. 주행거리를 줄인 만큼 탄소중립포인트를 더 주거나 실질적인 세제 혜택을 마련하는 유연한 설계도 생각해볼 만하다. 재택근무 권고처럼 이동 수요 자체를 줄이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 시민이 참여하는 진짜 '태산'을 만들려면 말이다.


이지예 기자 eas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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